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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쥬쥬 Jul 31. 2024

아프고 난 후에 알게 된 것들

암의 발생 원인은 '운이 없어서'라고 하는데, 내 운은 얼마나 없던 게야

수술을 2주가량 앞두고. 나름대로 일상을 잘 보내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가족들이 정신없이 만들어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일상 속 나만의 패턴이 시작되자, 감정 컨트롤이 어려워졌다. 특히 남편과의 일상이 가장 힘들다. 체력이 방전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전보다 짧아졌고, 기력이 떨어진 순간 오빠와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눈물이 난다. 아마도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그럴 테지만, 순간순간 감정의 극단을 치닫는 모습을 마주하노라면 나 조차도 놀라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지?' 싶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말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싶기도 하고. 남편이 아무런 의도 없이 툭 내뱉은 말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마치 내 몸이 아주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갑상선 항진증 때문에도 날카로웠는데, 요 한 달 사이에 극강의 날카로움으로 괴롭히고 있는 남편에겐 늘 항상 미안할 뿐 ㅠㅠㅠㅠ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필라테스 수업의 (수술 전) 마지막. 늘 항상 기분 좋고 즐거운 레슨 시간이었고, 나의 암 확진까지 이 당황스러운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 보았던 분이기도. 내가 변태 같은 운동 중독자라는 걸 잘 알고 계신 원장님은 수술 후 재활을 진행하면서 한번 보기로 하고, 하반기 수업을 기약했다. 투병 시작 전에 미리 체력을 올려놓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원장님 땡큐 쏘 마치. 덕분에 일주일 중 2시간은 즐거웠어요:)


다른 이야기지만, 청소기를 돌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확률적 싸움인데, 어느 쪽이든 내가 되지 않으라는 법이 없지 않나 싶은 그런 것. 무슨 말이냐면, 수술 후 기똥차게 관리를 하고 완치가 되어 잘 살아갈 수 있을 확률과 수술하자마자 든, 10년이 넘게 지나든, 다시 또 재발하고 전이될 확률이 말이다. 오전 내내 즐겁고 파이팅 넘치는 에너지로 레슨을 잘 마치고 와서는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은데. 이 의식의 흐름은 결국 또 인터넷이다. 에잇 젠장. 커뮤니티 보지 말고, 블로그 보지 말아야지. 네이버 카페는 탈퇴해 놓고, '이음'이라는 유방암 환우를 위한 어플을 다운받았었다. 내 탓이지 뭐. 이렇게 또 하지 말자고 결심해 놓고 지키지 않았던 내 죄로 회색 마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완치 판정을 받고 10여 년이 흐른 후, 엉뚱하게 4기 뼈전이가 되어 투병하고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고. 그리고는 마음이 심란해졌더랬다. 내가 안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 나는 괜찮을까? 누군가는 수술하자마자 전이돼서 다시 수술하던데. 누구는 전절제하고도 방사선을 하던데 등등등.  빌어먹을 걱정과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간다. 이 글 업데이트하며 어플 삭제 완료.


그러다 나의 의식의 흐름은 '왜 나는 암에 걸렸는가.'에 도달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암의 발병 원인은 모두가 알다시피 음주, 흡연, 스트레스, 과로, 호르몬, 환경, 유전, 비만 등 열거하자면 굉장히 많지만, 의사들이 공식적으로 말하기로는 '운이 없어서'라고 한다. 이것 또한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그렇다고 한다. 누구나 걸릴 수 있고, 누구나 암이 될 수 있는 세포를 몸 안에 가지고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자리 잡기까지는 내 몸의 컨디션과 합이 맞아야 하는데 그 또한 '운'이라고 한다. 그러니 암에 걸렸다고 내 자신을 자책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그런 환자를 곁에 둔 보호자 혹은 지인들아, 아픈 사람에게 너가 예민해서 그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라 그래. 술 담배를 많이 해서 그런거 아니야? 따위의 의사 코스프레는 집어 치워요. 그냥 다독여만 주세요. 당신들이 판단하고 발언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주제넘는 짓을 할까봐 끄적임. 그나저나 아무튼 결과적으로, 내 몸에 자리 잡은 암 새끼 운 진짜 좋았고, 나 새끼는 진짜 운도 지지리 없었다. 에라이.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언러키 하기까지, 나는 어떻게 살았었나?


40년의 삶을 돌이켜보니, 나는 늘 항상 쉴 틈 없이 살았다. 잉여로운 삶을 지향하지만, 잉여롭게 살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일도 완벽하게 하겠다는 욕심, 육아도 완벽하게 하겠다는 욕심, 집안일도 완벽하고 싶다는 욕심.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다른 것들을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 유난스럽게 다 잘했던 것도 아니다.) 결혼 전후로는 야근을 달고 살았고, 임신과 출산,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에는 초기 우울증도 있었다. 예정되지 않았던 임신에 많이 당황하기도 했다. 복직을 앞두고는 그제야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게 그렇게 좋았던 것 같다.


임신도 출산도 육아도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것이 서툴렀다. 아이 낳으면 아프다는 말이 말로만 들었지, 얼마나 아픈 건지 모를 수밖에 없으니. 바보같이 진짜 아픈대도 몰랐다. 출산 3개월이 지날 무렵, 대상포진이 왔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갑상선 항진증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걸 복직하고 알았다. 히지만 항진증 약을 먹어가며 회사는 꾸역꾸역 나갔고, 결국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해 갑상선 안병증으로 악화되었다. 안구가 돌출되고, 복시가 오기 시작하면서 병가 휴직. 방사선 치료와 스테로이드 약물 치료까지 이어가는 상황을 보냈다. 그리고 수치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돌아오고 나서 복직. 그런데 여기서 나의 몸을 잘 돌봤어야 했다. 갑상선 항진증에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스트레스를 쳐내지 못했다.


복직한 그 시절은 코로나19가 명명되기 직전, 우한폐렴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던 그때였다.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조직 내 선임의 위치에 오면서 해야 할 일, 해내야 할 일들이 산적했다. 코로나19로 다른 회사는 업무가 줄었다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조직이기에 그랬다. 게다가 일과 육아를 모두 하기 위해 업무를 집에 싸들고 와 아이가 잠든 새벽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그땐 그게 당연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진짜지 머리채 잡고 등짝을 때려주고 싶다.....ㅠ


위에서 말했지만 산후에 우울감이 정말 심했었다. 오빠가 출근 한 이후, 말 못 하는 꼬물이 아이를 앞에 두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벽 보고 앉아 울던 날이 많아지던 어느 날, 급작스런 결정으로 미레나 시술을 했다. 원래 다낭성난소증후군도 심하고, 불규칙한 월경과 생리통에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해지면서 미레나 시술을 쿨 하게 시행했다. 제왕절개로 출산했던 나는 미레나 시술을 마취 없이 하면서 극강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레나는 삶의 질을 매우 올려준 터라 나는 미레나 예찬론자가 된다. 심지어 5년 삽입 후 지난해 가을에 교체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밥은 안 먹고 음주가무를 좋아하던 과거의 나. 심지어 초딩 1학년 어린이 덕에 육아휴직을 하면서 와인 아카데미 레벨 2를 도전하겠다 마음을 먹었던 나. 아침에 눈 뜨면 커피 한잔을 내려 마셔야 눈이 떠지는 나. 침대에 누우면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새벽까지 잠을 잘 못 자는 나. '가만히 좀 앉아 있어'라는 말을 맨날 들을 정도로 몸에게 휴식을 제공하지 않던 나. 그런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것 같다.


이제는 좀 반대로 살아봐야겠다.

흐느적거리는 삶, 유연하고 흘러는 삶, 긍정적인 사고의 삶.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어야지.


노력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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