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뿌듯 Jul 27. 2024

22.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소녀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소녀

 6년간의 국민·초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나는 청명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청명여중은 청명여고와 함께 있는 여자 사립중고등학교다. 우리 학교는 여주, 이천에서 센 언니들이 다니는 곳으로 유명했다. 언니들이 스쿨버스에서 내려서 육교를 지나 학교로 오는 모습만 봐도 오금이 저려왔다.


 서로가 낯선 여자아이들이 1학년 교실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는 그 어색함이란... 혈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고요함이 더 무서운 법이다. 서로를 알고 싶지만, 경계가 앞서서 쉽사리 말을 걸기가 어려운…그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공기.


 헤어스타일은 무조건 단발, 길이는 귀 밑 3cm. 교복치마는 반드시 무릎을 보이지 않게 할 것.


어마어마 한 양의 규칙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인간이 이 규칙을 다 지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흰 블라우스에 초록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등교하는 그 길이 낯설지만 참 좋았다. 초등학교를 지나면서 내 발걸음에 힘이 붙어 속도가 더 났지만, 거리가 초등학교보다는 멀어 등교하는 시간은 비슷하게 걸렸다.


 학교는 매우 가파른 언덕에 있는데, 경사가 심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면 그 위에 선도부 언니와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내가 배우지 못한 '교련'이라는 과목을 담당하신다고 했다.


머리카락 길이는 적당한지, 치마가 짧지 않은지, 명찰과 타이는 제대로 했는지...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만지고야 그 언덕을 오를 용기가 생겼다.


 누군가는 자신이 검열되는 대상이 된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빴겠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학교 앞에서 나를 맞아주는 여러 명이 있는 걸로.


‘뿌듯이, 오늘도 학교 잘 왔어!‘


몇 가지 규칙들만 잘 지키면 반갑게 인사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기분 나빠해 봤자 선도부 언니랑 선생님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뭐. 나 좋게 생각하는 건 돈이 안 들어.’     

 쉽게 질려하는 나에게 중학교는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이 자신의 특징을 살려 수업을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목마다 공책이 필요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수업을 듣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인간 리트리버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5월의 어느 날, 등수가 매겨지는 인생 첫 시험을 본다는 공지사항이 있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설명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보는 거지 시험 전날 공부하고 그러면 반칙이야.’     


아마도 공부하기 싫은 핑계를 거창하게 댄 것 같다. 자기 합리화는 훌륭한 방어기제이다.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편안하게 시험을 치렀다. 이때만 해도 학급에 시험성적과 등수가 붙었다. 내가 누구 위에 있고 누구 밑에 있는지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가혹하다. 나는 나의 등수가 정확히 기억난다. 12등. 충격적인 숫자였다. 그리고 지은이와 친구들은 시험 전날 끊임없이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같은 교실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선생님께 배웠는데, 왜 쟤는 알고 나는 모르지? 참 열받네!’    

 

아빠가 물려준 소중한 승부욕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중1 때 담임선생님은 수학선생님 이셨다. 선생님의 부모님께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사랑하셔서 본 딴 이름이라고 하셨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면, 자신의 딸의 이름을 그렇게 지을 수 있는 걸까?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가 먹고살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본 적이 없는 대통령이라 궁금했다.      


 이때, 선생님의 헤어스타일의 큰 변화가 생긴다. 바로 매직스트레이트 파마를 하고 오신 것이다. 파마는 고불거리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파마계의 혁명이었다. 생머리처럼 찰랑찰랑하게 해 주는 파마라니!

 하지만 왠지 나는 그 모습이 웃겼다. 머리가 너무나도 직선으로 펴져 있어서, 마치 선생님이 움직이면 그 뒤에 머리카락들이 따라오는 모습이었다. 청소할 때 사용하는 대걸레가 거꾸로 서 있는 느낌이랄까? 대걸레가 서서 수학 수업을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담임 선생님이 안 계시는 청소하는 틈을 타, 아이들 앞에서 대걸레를 들고 선생님 흉내를 냈다.      


 “ -얘들아~~ 앙, 청소 열심히 해야지잉!!-  어때? 머리가 직선으로 펴져 있는 게 꼭 담임 같지?”


 내가 흉내 낸 것을 보고 아이들은 깔깔대며 뒤집어졌다. 하지만 잠시 후, 선생님이 교실 앞 문에서 내가 했던 행동을 보시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대로 대걸레를 들고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수돗가에 대걸레를 고이 모셔두고 학교 밖으로 도망쳤다. 할머니랑 싸우면 도망가는 것이 일상이었던 지라 달리기도 자전거만큼 자신 있는 분야였다. 책가방은 내일 학교 오면 만날 수 있으니까 미련을 버리고 집에 갔다.

 

 후환이 두려웠다. 오늘 하루는 도망쳤지만, 매일매일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이 오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은 전 날의 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시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선생님, 죄송했습니다. 늦게라도 사과드립니다.





* 여름의 절정입니다. 이 에피소드 어떠셨나요? 저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아이들이 저에게 별명을 붙이거나 놀리는 것엔 관대한 편입니다.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별명도 없는 것이니까요. 무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세요. 늘 그렇듯,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얏호! 여름방학이다'

이전 17화 21. 이 세상 최고의 할아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