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최고의 할아버지
삼둥이가 먼 여행을 떠난 후 헛헛한 마음을 달래 주는 건 여전히 지은이였다. 학교가 끝나서도 우리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전화기를 붙잡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통화를 했다. 나는 지금도 지은이네 집 번호를 외울 정도다. 그 당시는 휴대폰이 없어서 집 전화로 이야기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전기세 나오는데 아주 통화를 늙어 뒤지도록 하고 앉아있네.. 으휴 쯧쯧쯧"
"조용히 좀 해 친구랑 통화 중이잖아."
"옴마, 저년이 키워준 할마시 말은 안 듣고, 눈 흰자 뒤집어까고 지랄을 하는 것 보소. 동네 사람들 이년 와서 하는 짓좀 보시오."
"지은아 좀 끊고 나중에 하자. 아니 뭐 하는데? 사람이 뭐 이렇게 예절이 없어?"
"예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니년은 나한테 잘허냐?"
"내가 못하는 건 또 뭔데?"
"아이고, 니 행실을 네가 봐야 혀. 조상님한테 물어봐라. 너 잡아간다고 하지."
"자손을 데려가는 조상이 제대로 된 조상이야? 난 듣도 보도 못했네."
"저 썅년이 말대답은 드럽게 잘하네. 아이고 내가 내명에 못 죽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런 년을 키워가지고 속이, 속이 말도 못 하게 상하네. 오메."
"허구한 날 성질부리지 말고, 혈압약이나 먹어. 그게 할머니 신상에 편해."
"으이구 저년, 망할 년......."
지은이와 나는 6학년 때도 다행히 같은 반이 되었다. 3학년 이후로 아저씨 선생님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는데, 최준규 선생님은 매우 독특한 분이셨다. 여자 선생님들처럼 살가우시지는 않으셨지만, 아빠가 주시는 묵직한 사랑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졌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종이 치는 순간 반드시 책상에서 교과서와 공책 필기구가 알맞은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어야 했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셨다.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느껴야 하는 정적이 참 어색했다. 정리되어 있는 아이라고 해서 칭찬받지 않았고, 정리되지 않은 아이라고 해서 혼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공기의 무음이 우리 교실에 가득했다. 선생님의 마음을 읽기 위해 선생님의 눈동자를 끊임없이 바라보았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큰 뜻이 있었을 것 같다.
6학년 5월의 어느 날. 우리는 서울랜드로 소풍을 갔다. 운명의 장난처럼 거센 폭풍이 몰려와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몇 개 없었다. 나는 아빠를 닮아서 고소공포증이 참 심했는데, 친구들에게 지는 것이 싫고 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바이킹을 탔다. 내가 탄 바이킹이 그날의 마지막 운행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친구들의 불평불만이 가득했고, 선생님의 난감한 표정도 보였다. 나도 소풍 간다고 산 새 옷이 다 젖었지만,
‘나중에 친구들하고 얘기할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 생겼네. 날씨가 그런 건 어쩔 수 없지 ㅎㅎㅎ 그래도 바이킹 하나는 탔잖아! ’
그 조차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 친구 지은이는 글을 참 잘 썼다. 나도 지은이 따라 몇 번 백일장이라는 대회를 나가서 상을 탔다. 글을 쓰는 건 내 마음 저 구석에 있는 어둠에 빛이 들어와 언제 어둠이 있었는지 모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글을 쓰면 내 마음에 반짝 해가 나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래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사회시간에 국사를 배웠는 데, 고려시대를 배우면서 고려청자 사진을 보게 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인데, 아무리 봐도 너무 익숙했다. 할아버지 집 책장에 있는 도자기가 그 도자기와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고,
“할아버지 저거 고려청자지?”
“어떻게 알았어?”
“저 학 무늬 있는 도자기 오늘 공부했어! 저거 어디서 난 거야? 저거 국보라는데..?”
“그래. 맞아.”
“우와. 저거 그럼 팔면, 우리 부자 되는 거 아니야?”
“할아버지가 특별히 뿌듯이니까, 나중에 줄게. 어른 돼서 뿌듯이가 한 번 팔아봐 하하.”
“진짜?”
할아버지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다. 외 이종 손녀에게 국보를 물려주는 이모할아버지라니!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나 엄청 설렜다고... 이렇게 놀리기야? ㅎㅎㅎ’
지금도 고려청자를 우연히 보면 이모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졸업식날, 아빠와 새엄마가 졸업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학교로 왔다. 하지만 그날의 사진은 없다. 아빠가 망가진 카메라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이모할아버지는 이 점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졸업이 끝난 다음날 학교로 나를 데려가셨다. 손수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사서 1학년 때 담임 소미우 선생님, 6학년 때 담임 최준규 선생님과 사진을 찍어주었다. 지은이와 친구들 몇 명을 불러 추억도 남기게 해 주었다.
할아버지께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이 날 내 사진을 찍어주느라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만큼이나 소중한 나의 이모할아버지. 할아버지. 이 세상 최고의 할아버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린 방학이 왔습니다. 저의 부캐릭터인 글쓰는 일에 조금 더 매진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제 학급 단합대회를 했는데, 아이들이 선생님 1학기 동안 고생하셨다고 표현하는 거 있죠? 무려 중2 남자아이들이요. 정말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고마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 아이들과의 2학기가 기다려집니다. 무더운 여름 행복하게 보내세요. 다시 오지 않을 2024년도의 여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