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들이 있다.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 노력하면 불가능은 없다, 같은. 주변을 둘러보아도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쩌면 반대의 경우가 더 자주 보이는, 그럼에도 매번 누구를 툭 쳐도 자동 재생되는 그런 류의 이야기 말이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다고 하는데 나만 아니라고 하자니 망망대해에 혼자 떨어져서 표류하고 있는 것 같고 맞다고 하자니 도대체 착하다는 건 뭐고 나쁘다는 건 뭔지, 실패하는 건 꼭 노력을 안 해서인지, 알 수 없는 세상.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가족 관계의 사건들부터 거대하게 매일 터져 나오는 뉴스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물음표들이 따라오는 말.
복과 죄는 정말 공평하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인가.
상혁과 상혁의 가족에게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믿고 있던 것이 있었다.
공부를 하면, 열심히 하면, 대학을 가면, 좋은 학교에 가면, 졸업을 하면, 직장을 얻으면, 좋은 직장을 얻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집을 구하면 …
이 구체적인 듯 애매한 말들은 당최 끝나지가 않았다. 게다가 매번 새로운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달성해야 할 더 높은 기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도 어릴 적 읽던 이야기 속 착한 사람들은 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공식이라는 게 있었다. 흥부도, 혹부리영감도,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모두 이야기의 끝에선 행복해졌으니까.
상혁의 가족이 순진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바랬던 건 동화 같은 앤딩은 아니더라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잘 살았답니다’는 가능할 거라 믿었다는 것이다. 과한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경주에 끼어들어 달려보니 현실은 달랐다.
기준들의 테이프를 끊고 결승점에 도달해야지만 행복해질 권리가 생기는 것 같은, 그렇지 않으면 행복 근처에는 발을 디디지도 못할 것 같이 믿게 만드는 현실. 모두들 그 세상 속에 있었다.
그래, 남들처럼은 살아야지.
그게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먹고 싸는 거 이외의 시간, 아니 어쩌면 그런 생물학적 순간에도 상혁의 의식은 늘 저기 어디쯤 가 있었다. 자연스레 느끼고 반응해야 했을 대부분은 보류되고 자동으로 거부되는 느낌. 밥을 먹으면서도 머리로는 시험 점수나 앞으로의 계획이나 걱정들이 들어차 있는 식이었다. 밥이 맛있다는 건 혓바닥의 아주 작은 일부로 축소되었다. 처음부터 투철한 의지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노력하다 보니 좀 잘하는 편이었고 좀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더 노력하게 되는 그런 거였다면 너무 식상한 답일까.
대부분의 시간과 부모의 노후자금이 되었을 피와 땀들을 부어 넣었다. 그때가 되면 이라는 모호함을 기대로 애써 바꾸면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막연함 속에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뒤로 미뤄졌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듯 모호한 기준은 대부분의 현재를 빨아들여 거대해 질대로 거대해져 갔다. 어느덧 미래 이외에 의미 갖는 게 없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이 끝난 건 서울에서도 꽤 좋은 대학을 졸업한 그가 더 이상 취업원서를 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난 후였다.
100번의 피날레였다.
누군가는 눈을 낮춰 시작해 가면 되지 굳이 대기업에만 가려고 하느냐, 100개 추가로 더 쓰는 건 기본이다, 배가 불렀다는 말들을 쏟아내곤 한다. 상혁은 취준생 기간 동안 딱 한 군데 작은 회사를 인턴으로 6개월 정도 다니던 어느 날 그는 깨닫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직급이 높아지면 나아질 거라는.. 경력을 쌓아 좀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면 연봉이 높아질 거라는 어린 시절보다는 세세해진 미련 섞인 말들이 상혁에겐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멀리 아득히 멀어져 갔다.
‘ 내가 누구였더라.. 여긴 어디지..?’
상혁은 그제야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 부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정신없이 들여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어떻게든 자신을 유지해보려 몸부림쳤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 아주 가끔 조금은 뭘 먹고 싶은 것 같은데? 치킨? 이 먹고 싶어.. 그럼 먹고 싶은 느낌이 나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