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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훈 Aug 23. 2024

2024.8.19~2024.8.23 독서목록

왜 고전인가

칼의노래, 김훈 저, 문학동네출판
사람과 시대


이념. 한반도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다. 76년 전 이념이 한반도 허리를 두동강냈다. 38도선 이북에는 공산주의가, 이남에는 자본주의가 들어섰다. 냉전은 33년 전에 끝났다. 공산주의가 소련과 함께 붕괴했지만, 한반도에서는 대립이 끝나지 않는다. 지난 목요일은 79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光復)은 빛 광 자에 돌아올 복 자를 쓴다. 광복절은 이름으로 우리 민족에게 일제 치하가 어두웠음을 알린다.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 이념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엔 독립만 있었다. 외세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강해야 했고 강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독립에 이르는 공식은 없었기 때문에 열사들은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찾아나섰다. 처음부터 좌우는 없었다. 1945년 8월. 36년간 자리를 비웠던 이념은 독립과 함께 돌아왔다. 난세를 함께하지 않은 죄가 컸기에 이념은 좌우를 갈랐다. 효과가 좋았다. 독립하자며 힘을 모으던 사람들은 어느덧 누가 더 옳았느냐며 갈라서기 시작했다. 논쟁은 끝나지 않고 올해 광복절까지 이어졌다.


광복절에 <칼의 노래>를 읽었다. 군부는 충무공 이순신을 무신(武神)으로 추대했다. 충무공 인간상이 정부 지침과 맞았기 때문이었다. 1987년 군부가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김훈은 이 시기에 <칼의 노래>를 썼다. 소설 속 충무공은 인간적이다. 답답한 순간 초정수를 찾고, 품었던 여인을 그리워하며, 아들 부고에 남몰래 눈물을 훔친다. 작가는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을 철저하게 재창조했다. 정보가 온전치 않음에도 본질을 꿰뚫는 서사가 마음을 울린다.


지식은 경험과 감수성을 곱한 결과다. 유발 하라리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공식이다. 정보를 온전히 전달하려면 경험과 감정이 필요하다. 역사를 완벽히 재현할 수 없는 이유다. 근대 후기 서양 지식은 생물학 지식과 함께 확장했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는 인본주의 세계로 바뀌었고 학계는 '절대적 명제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겪지 않은 역사는 재현할 수 없고 관점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다시 광복절을 바라본다. 이념이 독립운동을 평가하는 시대. 광복에 담긴 참뜻이 이념인가.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촌극에 마음도 울리지 않는다.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저, 민음사출판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저, 민음사출판
강렬한 고요함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판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지하수를 찾지 않는다. 우물 속에서 솟는 물은 누군가 목말라 했다는 증거다. 책도 같다. 삶에는 정답이 없어 사람은 책을 읽는다. 답을 아는 사람은 탐구하지 않는다. 서점을 한가득 메운 책은 누군가 답을 찾는다는 증거다. 사람들은 가르침을 얻으려고 수백 년 전에 나온 책을 읽는다. 각자 삶이 다른데도 독자는 작가 이야기에 울고 웃는다. 사람은 시대를 떠나 한결같다. 세상은 돌고 사람은 같은 고민을 반복한다. 고전은 그래서 특별하다.


현대 사회는 감성을 말살한다. 오그라든다는 표현이 낭만을 죽였고 선비라는 신조어가 절제를 없앴다. 나댄다는 표현에 용기가 쓰러졌고 설명충이란 표현에 흐르던 지식이 끊겼다. 아집만 살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세상 보기가 편하다. 내가 기준이니 남은 늘 틀렸다. 은둔형 외톨이, 빈곤, 노사관계, 성별 갈등 등. 능력 없는 개인이 문제를 일으킨다. 감성이 사라진 사회는 각박하다. 사회가 이끌던 문제를 개인이 주도할 뿐. 21세기에도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는 계속된다.


20세기 캘리포니아는 19세기 런던이었다. 산업화 당시 수입이 사라진 영국 농민은 토지를 포기하고 런던으로 향했다. 대공황 당시 은행에 토지를 빼앗긴 미국 농민도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기업은 임금을 후려쳤고 농민은 런던과 캘리포니아에서 빈민이 됐다. 사회 문제였지만 정부는 민간에 책임을 미뤘다. 감수성이 말라버린 도시는 생활 공간이 아닌 생존 공간이 됐다. '후버빌 빈민은 왜 생겨나나.' 1930년대 캘리포니아 대중이 묻자,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로 답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포도를 품는다. 그 포도는 분노로 익는다.' 스타인벡이 쓴 글귀다. 작가는 불합리한 세상에 분노하는 사람들을 봤다. 100여 년이 지났다. 독자들은 <분노의 포도>를 읽고 여전히 눈시울을 붉힌다. 우리 가슴 속에도 포도가 익는다. 소설은 로즈샨이 노인에게 젖을 물리면서 끝난다. 창피를 무릅쓰고 사람을 구하는 여자. 고다이버 부인이다. 돌아온 성녀가 묻는다. 세상은 변했느냐고. 오늘도 어디선가 포도가 익는다. 달콤 쌉싸름한 향이 짙다.




글은 재밌다. 생생할 때 쓰면 신선하고 묵혀 쓰면 풍미가 깊다. 이번 글은 풍미가 깊은 쪽이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는 편이 맞갖겠다. 글이 마음에 들 때까지 쓰고 지웠다. 책에 비해 미천한 글솜씨가 부끄럽다. 그런데도 자판을 두드렸다. 누군가에겐 묵은지 같은 글이 되길 바라면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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