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소설, 르포같은 소설
한강 작가의 소설은 시적이고
시는 소설적이다.
주인공의 어떤 면들은
작가의 모습을 닮아있다.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자기 자신이
인물 속에 투영되어 있었다.
한강 작가는 보통 사람보다
상상 이상으로 인간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고 몰입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팩트를 철저히 조사하고 압축한다.
이 작품을 쓰는데 4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이 책의 전반부는
시적으로 꿈과 풍경을 묘사했고
후반부는 인물의 대화를
연극 대사처럼 써내려갔다.
대사 내용은 마치 다큐같기도 하고
르포기자의 취재같기도 하다.
절대 후루룩 빠르게 읽을 수 없는
스토리와 표현들.
창밖이 새벽에 내린 눈으로 덮여있어
이 책을 읽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겨울이 가기 전에
읽기를 권한다.
[필사]
오래된 여러 신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것이
천상이나 명부에 존재한다면,
거기 담긴 나의 지난 사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
(12-13쪽)
눈송이들이 콧잔등과 입술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따뜻한 얼굴을 가졌으므로
그 눈송이들은 곧 녹았고,
그 젖은 자리 위로 다시 새로운 눈송이가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83쪽)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05쪽)
그떄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된 건지도 몰라.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갱도 속에 쌓인 수천 구의 몸들 중 하나.
동시에, 불 켜진 집들의 대문을 두드리는 청년.
그곳에서 옷을 얻은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사람.
이건 얼른 태워버리십시오.
피투성이 수의를 마당에 남기고
암흑 속으로 달려 사라지는 사람.
나는 설득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살 수 있었을지
의문했을 뿐이다.
총살 직전 정신을 잃고 갱도로 떨어져
총알을 피했을까.
군인들이 떠난 뒤 시체들 속에서
눈을 떴을까.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제1수평갱도 입구를 향해 기어갔을까.
(291-292쪽)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중략)...
갓난아이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중략)...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317쪽)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단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