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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Dec 01. 2023

예쁜 애인, 잘생긴 애인

일상 16



요새 스스로에게 힘내, 힘내, 하고 말을 해봐도 영 기운이 없는 날이 지속된다. 성격이 이래놔서 가족들에게는 무뚝뚝해도 친구들에게는 상냥한데, 연말이라 바빠진 친구들을 만날 일이 적어지니 기운을 얻을 새도 없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친구들과 언제 얼굴을 볼까 생각중이었다. 가장 친한 M과 Y에게는 다시 연애를 시작한다고 말한지 1주가 조금 넘은 오늘, M이 다음주에는 같이 꼭 전시회를 보러 가자기에 덥석 그러자고 대답했다. 


M은 유학 시절 대학을 함께 다닌 동기인데, 이제는 거의 유일해진 나의 단짝 남사친이다. 다음주에는 쭉 애인의 집에 있을 생각이라 M을 만나기에도 편해진다. 걱정말고 같이 이리저리 놀러다니자, 그랬더니 내 애인이 자신을 만나는 걸 불편해하지는 않느냐고 묻는다. 그게 말이야, 서로 그냥 전부 믿어보기로 했더니 안 불편해하더라. 네가 남자든 여자든 아무 문제도 안 될거야. 그랬더니 M이 웃었다. 내가 그런 건강한 연애를 하기를 기다렸다며.


나는 연애를 하는데에 성별의 한계가 없다. 여자든, 남자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만나는 편이라 애인을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로 한정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돌아오면 슬그머니 웃으며 말을 피한다. "남자친구 있어요?" 하는. 남자친구를 사귀는 중에도 나는 그 말에 영 대답을 하기가 꺼려진다. 사회성 없는 사람처럼 눈빛을 죽이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물어보지 말라 상대에게 무안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 공연히 목소리를 높이며 뭐야? 내가 여자친구 있으면 어쩌려고요! 하고 답하면 보통 두 개의 답변 타입이 있다. 하나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여자가 여자를 왜 사귀어요?" 또는, "그럼 여자친구 있어요?" 하고 장난기 있게 물어오는 타입. 어느 쪽이든 대답하기 번거롭지만 이왕이면 두번째 질문이 편하다. 아뇨,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있었어요. 혹은 언젠가 또 다시 생길 수 있겠죠. 하고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거든.


그래서 그런지 이런 내 성향을 아는 우리 아빠도 요새는 정말 트렌디하게 질문을 한다. 원체 이혼 후에 상처를 많이 받은 속 깊은 남자라 사랑을 믿지 않는 분이었지만 지금은 예쁜 여자친구도 있는 모양이라 나의 연애에 대해 살짝 궁금해 하기 시작했거든. 요새는 어때? 예쁜 애인이야 잘생긴 애인이야? 하는 열렸다 도로 닫힌 괴상한 질문을 던지는데, 나는 이게 정말 웃기고 좋다. 그럼 나는 아빠와 차 한 잔을 가볍게 나누며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가끔은 진중한 얘기로 접어들 때, 아빠의 입에서 절대로 떼어지지 않는 말이 있다. 연애를 누구랑 하든, 어떤 성별과 하든, 어떤 조건에서 하든, 결국 중요한 것은 '적당히'라고. 적당히 의지하고, 적당히 신뢰하고, 적당히 사랑하는 것. 원래 사람은 욕심이 많은 동물이라 품을 수 있는 것을 넘어서면 분에 넘쳐 중요함을 잃게 되니까. 맞는 말이다.


오늘 애인이 이른 시간에 퇴근한다. 회사가 참 좋아, 점심시간을 조금 당기고 더 일찍 업무를 끝내준다는 거야. 최근 더 높은 직급으로 진급하게 되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인데 오늘 얼굴 한 번 보고 꼭 끌어안아줄까 한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내일은 그 친구도 본가에 가야하고 나도 얼굴 보기 싫은 외갓집 가족들을 보러 사촌언니 결혼식에 가야해서. 사실 정말로 가기 싫은데, 하객복으로 산 원피스와 구두를 입은 모습을 보고 애인이 웃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 엄마 옆에서 반짝반짝 빛내주고 돌아오라 해서 용기를 좀 얻었다. 회사 하나 안 다니고 여전히 절고 있는 딸이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 옆에서 우수한 인재 얼굴로 좀 앉아있어줘야 힘을 실어주지. 좋았어. 오늘 내 예쁘고 잘생긴 애인과 맛있는 명랑핫도그를 뜯고 내일 아침에는 맑은 마음으로 나가자. 소원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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