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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Dec 17. 2023

J에게

보내지 못할 마지막 편지


친애하는 J에게. 오늘은 눈이 펑펑 내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어, 하루 종일, 온통.


내가 보낸 캐나다의 마지막 겨울은 비와 눈이 번갈아가며 눈을 매캐하게 만들었어.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하며 짐을 챙기던 그날이 선연해. 내가 사랑하던 가을 하늘은 벌써 온통 회색뿐인 겨울하늘이 되어버렸고, 내가 사랑한 단풍들은 아주 일찍도 져버려서 얼마나 서운했었는지 몰라. 가끔은 그런 하늘도 괜찮다고 늘 생각했었던 옛날과는 달리, 그때의 나는 그 하늘이 조금 미웠던 것도 같아. 서쪽의 가을 하늘은 늘 청명하고 땅에 내려앉을 듯이 가까웠는데, 교정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두유를 넣은 라떼를 마시면 그게 그렇게 좋았거든. 그런데 내가 가던 날조차 끝까지 그 하늘은 울상이더라. 이제 생각해 보면 10년간 나를 돌봐준 하늘이 내심 나 떠나는 게 섭섭했었나 싶어.


J,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 모든 것들이 우연으로만 만들어져 있다면 좋겠다고. 내가 무슨 노력을 했는지, 어떤 결정을 했는지, 그런 건 아무도 몰라도 좋은 거야. 정말 우연으로만 이뤄진 것들을 마주하면, 나도 언젠가는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 후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을 때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그렇지만 그건 정말 꿈의 조각 같은 것들이라, 끝없는 우주의 끝을 상상하는 우리들이 으레 그렇듯 공상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더라. 그러니 나중에는 나는 그런 우연을 받아들일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모든 우연이 긍정적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오늘 얼마나 큰 눈이 왔는지 사방이 하얗고 바람이 세게 불었어. 네가 춥지는 않을까 한참을 생각하면서 바보 같게도 그건 내 몫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쉽지 않았어. 그러나 네게 오늘이 행복한 날이었길 바라. 너는 낭만적인 것들을 좋아하잖아. 비가 오기 전의 풀 냄새, 부서지는 햇살, 상쾌한 바람, 흔들리는 얇고 흰 커튼, 늦은 밤에 아스라이 켜져 있는 전구불 같은 것들 말이야. 오늘 눈은 네게 어떤 눈이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가 적어둔 미스터 로렌스의 이름을 들여다보았을까.


J, 네가 말했지. 내가 부디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지 몰라. 어떤 행복은 낙관이 삶의 전부였던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아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런데 들어볼래? 며칠 전에는 정말로 행복한 연락을 받았어. 그저 스쳐갈 수도 있었을 어떤 말들을 소중히 눈 담아 읽고 내게 따뜻한 조언을 남겨주신 어떤 분이 계셨거든. 아침의 불운했던 나는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말들을 죽 읽어보다, 모든 어미를 행복이라고 읽기로 했어. 그분의 조언에 행복을 느낀 건 나의 단순함이었지만, 그 글을 내게 남겨주실 때까지의 그분이 가지고 계셨을 그 따뜻함은 아주 어렵고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필연 같았거든.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행복했어. 이 말을 네게 들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참 아쉬운 날이었지.


나는 요새 사랑이라는 걸 다시 해보고 있어. 처음에는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찬찬히 익숙해져 가면서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사랑이 너무 과하게 커져버리면, 결국 내 상처를 돌봐야 하는 것은 나인데 내 손이 그 상처를 다 덮지 못하더라고. 너도 알고 있지?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조금 어른스러운 내가 되어볼까 하게 되었어. 이 추운 날에 차가워진 그 사람 손을 꼭 잡고 온 힘을 다해 입김을 불어 녹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해봤거든.


J, 날이 점점 더 추워지고 있어. 가을이 가버린지 꽤 되었는데도 너무나 생경한 겨울이야. 감기는 걸리지 말아. 너는 네가 아파도 남을 걱정하는 괴랄한 버릇이 있잖아. 너의 그림자 없는 우울함이 너의 하루를 덮어버리지 않기를 바라. 여유를 가지고, 숨을 찬찬히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도 잊지 마. 충분히 물 몇 컵을 챙기고, 든든한 식사로 배도 잘 채우고, 어지럽지 않게 비타민 따위도 잘 챙기고, 깊은 양질의 잠을 자길. 우리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네가 가진 삶에 대한 투철한 집착으로 너를 달래는 시간을 가지길 기도할게. 보내지 못할 편지는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고요한 밤이 되길.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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