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는 무엇을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우리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단순히 '공부하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 명문대가 아니었지만, 대단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항상 공부를 했다. 우리는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다 만났는데 근무하다 여유시간이 생기면 레지던트 옆에 앉아서 본인이 공부하다 모르는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했고, 간호사임에도 의사들이 보는 내과학을 들고 다니며 심심풀이 땅콩처럼 읽고 외우는 것을 좋아했다.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결혼생활 11년째인 지금도 유지 중이다.
우리 남편은 공부하는걸 참! 좋아한다. 아직도 치과의사가 되고 싶고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남편이다.
우리 남편 나이 37살.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뭐가 저렇게 한이 맺혔나 싶을 만큼, 상황이 되고 환경이 갖춰진다면 언제든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가 셋, 이미 투잡을 갖고 있는 당신에겐 이젠 어림도 없는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남편은 침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나도 대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1학점짜리 한의학과 관련된 공부를 한 적은 있지만 정말 재미없고, 지루하고, 한자도 많고, 이게 뭐가 그렇게 효과가 좋다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겨우겨우 학점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와는 반대로 우리 남편은 침과 뜸의 효능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른다며, 이게 진짜 얼마나 좋은지 알려주고 싶고, 자기가 기회가 된다면 이쪽으로 더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침과 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결혼을 하고 나서 첫 아이를 낳고도 했고, 이민을 와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서도 했다. 셋째 아이를 임신했을 땐 우리는 이미 이곳에 작은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직장도 있고, 영주권도 있는 모든 것이 안정된 시기였다. 2살, 3살 터울의 아이들 셋을 부모님 도움 없이 키운다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셋째 아이를 가졌을 때도 틈만 나면 이야기하는 침술공부.
"안 되겠어. 내가 볼 때 오빠는 하루라도 빨리 이 공부를 시켜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얘기할 거 같아. 그러니까.. 그냥 해! 학교 한번 알아봐. 아이들은 뭐 내가 어떻게든 키워볼 테니까. 당연히 오빠는 일도 해야 해. 그건 알고 있지? 일은 어떻게 할 건지, 학교는 학비는 얼만지, 은행 대출은 가능한지, 2교대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상황이 되는지 한번 일단 알아봐. 알아봐서 가능하다고 하면 하게 해 줄게."
이 당시는 우리가 가진 모든 돈을 탈탈 털어서 은행도움 95% 받아 집을 산 때라 더 이상의 은행 대출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모든 마음을 다해 도와주고 싶어도 여러 가지 여건상 학교를 다닐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접어야지 어쩌겠나 생각했다.
은행에 상담을 다녀온 오빠가 학비 대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러고 나서 직장(병원)에 학교 다니는 이야기를 했더니 데이근무를 전부다 나이트 근무로 바꿔주겠다는 게 아닌가. 직장에서까지 이렇게 도와주니 그럼 본인이 다닐 학교를 한번 가봐야겠군. 학교를 가서 상담을 받아보니 학교는 2년. 실습시간도 어마어마하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봐야 하는데 그렇다고 절대 못 다닐 상황도 아니었다.
모든 상담을 마친 끝에 오빠가 말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나 학교 다닐래. 병원은 2년간 나이트 근무만 하면 되고 병원 끝나면 학교 가서 수업 들으면 될 것 같아. 그리고 틈틈이 내가 집안일도 도와주고 애들하고도 놀아줄게. 잠은 좀 못 자겠지만 시간 될 때 틈틈이 자면 괜찮을 거야."
앞날이 깜깜했다.
그래.. 이왕 허락한 거 2년만 버티자. 2년만 버티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2년간.. 우리 집엔 슈퍼맨이 살았다.
남편은 2년간 학교 진도를 따라가고, 실습하고, 매 시험을 보고, 병원에서 근무하고, 집에 오면 어린아이들과 놀아주고, 집안일도 도와주는 슈퍼맨이었다. 잠은 조각잠을 잤다. 그런 남편이 너무도 안쓰러웠지만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공부를 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한편으론 자랑스러웠다.
아이 셋 아빠. 32살에 컬리지 대학. 밤근무 12시간씩 2년간. 육아와 집안일도 도와준 남편.
아무나 못하는 일이었지만 고맙게도 남편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남편은 또 하나의 정식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젠 합법적으로 언제든 침뜸 봉사를 나갈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치료도 해주는 Acupuncturist가 되었다.
남편이 처음 캐나다 병원에 입사했을 때 해주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우리 병원에 70세 할머니가 있어. 간호사야. 은퇴를 했어야 했는데 은퇴비용은 받았는데 집에 있기 심심하니까 아직도 일하러 나와. 가끔 새로운 기계를 보면 다루지 못해서 도움을 줘야 할 때는 있지만 일하는데 크게 문제는 없어. 70세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다니 너무 대단하지 않아?!"
70세에 현장에서 뛰고 있는 할머니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캐나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일손이 하나라도 필요한 캐나다 의료 시스템 내에서 할머니 간호사의 손길은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부족한 인력을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이곳 캐나다에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들어가는 사람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을 다 키운 30대, 40대 아줌마들이 대학에 다시 들어가기도 하고, 늦게 이민을 오신 50대 아저씨들이 대학을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이 처음엔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든, 단순히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든,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든, 그렇게 컬리지에 입학했다가 일을 시작하고 좀 더 공부를 해볼까? 하는 마음에서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22살에 이민 와 2~3년간 영어학교를 다니다 그 점수로 20대 후반에 치과대학에 들어간 사람, 20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일하다 캐나다로 이민 와 기초영어부터 공부하다가 캐나다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30살 넘어 치과대학에 들어간 사람, 아이 둘 키우는 30대 아빠가 영어점수로 원하는 캐나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하고, 아이 셋을 다 키운 30대 후반의 아줌마가 간호사가 되고 싶어 대학에 입학하기도 한다.
공부를 하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성실히도 보여주는 나라 중 하나가 캐나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일하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당신이 무엇을 하던 사람이던, 당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 있던 없던, 당신의 나이가 얼마이던 상관하지 않고 기회를 주는 나라.
100세를 사는 이 시대에 꿈이 되고 힘이 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