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정리하고 실행을 준비하는 표준 설계도
과장으로 승진하고 나서,
처음으로 사업기획서와 마케팅 기안문을 초안부터 직접 써야 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문서 작성 자체는 익숙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흐름 위에 자료를 채워 넣는 일들은 어렵지 않았었거든요.
심지어 보고서 잘 쓴다고 꽤 칭찬도 받았었죠.
그런데 막상 보조자가 아닌 주 작성자로서,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시작하려니 생각보다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광고도, 고객 이벤트도, 영업점 프로모션도,
남들도 다 하고 있고 우리도 성과를 내려면 뭐라도 하는 건 당연한 건데, 기안문에 차마 그렇게 쓸 수는 없었습니다.
이 마케팅을 '왜 꼭 해야 하는'것이라 설득할지
이를 통해 해결하고 싶은 '현재의 문제점'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
제안한 마케팅의 적정 예산은 왜 9억이, 11억이 아닌 10억이었는지
이 마케팅으로 고객이 늘어나는지, 자산이 늘어나는지. 또 그 정도가 1천명일지 아니면 1.5천명일지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와 흐름으로 풀어야 하는지
분명 회의 시간에 자신있게 얘기도 잘 했고 많은 분들의 지지와 동의도 얻었는데, 이를 글로 쓰려니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딱히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 동안은 늘 현업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마케팅 이론들을 다시 하나씩 찾아보았습니다.
포터의 산업 구조 분석이나, 코틀러의 4P 같은 기본 이론들. 그리고 공모전 기획서에 자주 써먹던 STP 공식들..
이런 건 학교에서나 배우는거지, 하고 내심 좀 폄하하고 있었던 마케팅 이론들이었는데,
이를 기준 삼아 하나씩 흐름을 잡아보니,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현업에선 중요한 항목들이 달랐기에 경우에 따라 더하고, 빼고, 또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디서부터 생각을 시작해야 하는지는 명확해졌습니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의사결정이 경험과 직관에 의존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방식이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그 결과의 기복이 크거나, 성공 또는 실패의 이유를 모르는 채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성과가 들쭉날쭉해지지 않고, 결과에 대한 성공 요인을 자산화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실행의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마케팅 이론들은 정답을 알려주기보다는,
경험을 보완하고, 판단을 조금 더 일관되게 만들어, 성과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4P라는 틀이 있죠.
고전같은 친구입니다.
Product, Price, Place, Promotion.
상품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가격은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어디에서 고객을 만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익숙한 개념이지만, 현장에서도 가끔 이 기본 틀만으로도 현상의 분석에 체계적인 설계도가 제공될 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참여했던 업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4년말 메리츠증권이 리테일 사업의 시작을 고민할 때, 경쟁사들은 10여년 전부터 경쟁에 뛰어들어 이미 시장을 확고히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모바일 트레이딩은 선점되어 있었고, 수수료 경쟁도 거의 한계까지 내려와 있던 상황이었죠.
이 상태에서 단순히 “수수료를 조금 더 낮추자” 정도로는 차별화가 어려웠습니다.
4P를 기준으로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면서 가능한 모든 것을 남들과는 다르게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상품이 비대면 전용 계좌 ‘슈퍼365 계좌’였습니다.
당시 해외주식거래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는데도, 대부분 증권사의 달러 예수금 금리는 0.1%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주식 수수료에 비해 해외주식 수수료는 10배는 높은 수준으로 형성되어 있었죠.
Product
메리츠증권은 이 계좌의 달러 예수금을 그냥 두지 않고 RP(환매조건부채권)를 자동으로 매수하는 서비스를 붙여, 연 3.5%의 금리가 안전하게 제공되는 구조로 설계했습니다.
단순한 위탁계좌가 아니라, ‘예수금도 자동으로 운용되는 계좌’라는 개념을 만든 겁니다.
투자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고객의 돈이 놀고 있지 않게, 돈이 돈을 벌게 한 것이죠.
심지어 다른 증권사들은 이자를 거의 주고 있지 않던 상황이었는데도, Super365 계좌는 웬만한 정기예금 수준의 이자를 예수금에 되돌려주는 선택을 했습니다.
Price
상식을 걷어내고 생각해보니, '업계 최저 수준'은 파괴적 수수료가 아니었습니다,
'2년간 모든 고객에게 거래수수료 0원, 이게 가능하다면 시장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무료는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면밀히 계산해보니, 회사의 이익 체력으로 이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예수금 금리는 최고 수준으로, 거래수수료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제로 수수료'로 정해진겁니다.
일단 주어진 조건 하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Product와 Price의 두 가지였고, 의사 결정과 실행은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Promotion
위 전략들을 시작하면서 유인나와 신세경 배우를 기용하였고, 빅모델을 활용하여 브랜드 이미지를 빠르게 새로 만들어가며 기존에 본 적 없던 광고와 고객 이벤트들을 진행했습니다.
그 동안 기업금융으로만 성장해 온 메리츠로서는, 역시 해보지 않았던 파격을 동시에 시도했던 셈입니다.
Product, Price 전략과 시너지를 내며 이는 급속도로 고객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메리츠증권의 'Super365'계좌는 시장 점유율 0%대에 불과했던 해외주식 거래를 공략한지 1년여만에, 결국 M/S 20%를 넘기며 26년 초 시장 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서울경제, 26.3.30 기사 참고)
Place
사실 Place는 더 중요한 부분이었죠.
기존의 앱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네이버증권, 토스, 카카오 등 빅테크 출신의 전문가들을 모아 아예 새로운 투자 플랫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플랫폼도 오랜 준비를 마무리하고 26년 내 출시를 준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에 없었던 글로벌 투자 커뮤니티와 투자 전용 AI들이 탑재되어 새로운 혁신을 제공하게 될 예정입니다.
메리츠증권 'Super365' 사례에서 보듯, 어떠한 결과도 직관에서만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상품을 만들고, 어떤 가격으로 설정하고,
무슨 메시지로 설득하며, 어디에서 고객을 데려올 것인지가,
모두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을 기획하는 데에 있어서,
단순하지만 유용했던 것이 바로 4P라는 오래된 틀이었습니다.
마케팅을 오래 할수록 경험은 쌓이지만, 그 직관만으로는 방향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실무자와 의사결정자, 경영진까지 모두 이해하고 의논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필요한데, 이런 마케팅 이론들이 그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케팅 이론은 현업에서 ‘쓰는 것’이라기보다, 현업을 하다 보면 결국 다시 또 찾게 되는 언어, 또는 그러한 기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