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세분화를 통한 기회 요인 탐색부터
마케팅 부서에서 진행하는 여러 주요한 업무 중 시장 세분화(Segmentation) 조사 업무가 있습니다.
이는 시장의 기회 요인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또 이 시장을 이루는 고객층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파악해 보는 조사입니다.
과거 은행에서 근무할 당시, 급하게 중소기업(SME : Small and Middle Enterprise) 시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새로운 대출 사업의 기회 요인을 발굴해야 하는 과제를 받았어요.
당시 제가 근무하던 SC제일은행의 리테일 사업은 개인 신용대출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규모를 이루는 주택담보대출 상품에서는 KB국민은행과 같은 메이저 은행들이 규모의 경제를 기반으로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죠.
그래서 SC제일은행은 글로벌 선진 리스크 모델을 기반으로 한 중금리, 중수익 중심의 후순위 신용대출을 타겟팅하는 전략에 집중했습니다.
다행히 전략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었고, 금리가 좀 높긴 해도 고객 입장에서는 저축은행이나 캐피탈이 아닌 시중은행의 대출이었기 때문에 해당 상품은 틈새시장을 잘 공략하며 나름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한 직후, 한국 금융시장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모델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물 경제에서도 어려운 경제 사정이 계속되면서, 이미 실행되어 있던 대출들의 연체율이 올라가기 시작한 겁니다.
개인회생이나 파산 신청도 눈에 띄게 늘어나서 회수가 불가능한 채권들도 상당 부분 생겨났지요.
이 상태에서 같은 방식으로 개인 대출을 더 늘리기 어려웠음은 물론이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수익원은 어디서 찾아야 하지?”
가장 먼저 떠오른 대안은 기업 대출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편중되어 있었던 개인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아직 시장 점유율이 낮은 SME, 즉 중소기업 대출 쪽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혀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중소기업의 여신(대출) 규모가 가장 큰 기업은행 등의 사례를 보니,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업대출은 건전성에 별 문제가 없이 확대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잘 모르는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려다 보니, 중소기업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는 중소기업 고객들은 너무나 다양해서, 고객군을 나누는 것부터도 애를 먹었습니다.
규모도 다르고, 업종도 다르고, 자금을 쓰는 이유도 전부 달랐습니다.
실제로 중소기업 사장님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해보니 이 시장을 하나의 묶음으로는 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조업은 원재료를 구매하거나 공장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빌릴 곳이 필요했고,
서비스업은 이따금씩 보릿고개에 빠질 때에 대비한 사업의 운전 자금이,
유통업은 고객에게 구매대금은 빨리 받고, 공급업체에 대한 지급(매입채무)는 늦춰 현금전환 주기를 단축하려는 니즈가 강했습니다.
기업의 매출액 규모에 따라서도 어떤 기업은 금리를 보고, 어떤 기업은 한도를 보고, 또 어떤 기업은 대출이 실행되는 속도나 대출담당자의 서비스 측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하나로 뭉뚱그리려다 보니,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STP가 이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기준 틀로 등판한 순간이었습니다.
STP는 시장과 고객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STP는 전략 프레임워크라고 배웠습니다.
Segmentation, Targeting, Positioning.
하지만 막상 현업에 이용하려고 이리저리 뜯어보니, 이건 현상을 설명하는 전략 프레임워크라기보다, 마케팅에서 복잡한 시장을 나눠보는 실질적인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특정 시장을 어떻게 구분해 볼 것인지(Segmentation),
그 중 어느 고객층을 주력할 타겟으로 선택할 건지(Targeting),
그들이 왜 우리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할 건지(Positioning).
고객의 특성별로 원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같은 모둠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하면 계속 꼬이고, 이를 세분화해서 한 그룹씩 나눠보니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SME 대출을 확대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로와 세로의 축으로 시장을 나누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중소기업 시장.. 이 자체도 대출을 위한 또 하나의 세분화된 시장인데..”
하지만 이건 아직도 여전히 그냥 하나의 덩어리에 가까웠던 거였죠.
그래서 여러 항목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중요한 두 가지를 기준으로 잡고 가로와 세로 축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가로축은 기업의 매출액 규모, 그리고 세로축은 업종 구분, 이런 식으로요.
SC제일은행에서는 매출 규모(SOHO(자영업자), SB, ME1, ME2)와 업종을 기준으로 고객을 나누고, 각 그룹의 거래 규모와 패턴을 같이 봤습니다.
시장 세분화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히트맵'을 그려보는 단계였던 거죠.
그렇게 나누고 나서야 조금씩 그룹별 특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객도 많고 대출의 규모도 큰 그룹,
고객 수는 많은데 거래 규모는 작은 그룹,
고객 수는 적지만 기업당 대출 규모가 큰 그룹,
그 전까지는 그저 “SME 시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시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고객층의 구조가 보였습니다.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그려 본 히트맵을 통해서, 매출규모와 업종별로 구분한 각 블록들이 가지고 있는 수익 기회들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장 세분화를 하고 나면 이제 어느 블록의 고객층을 공략할지 선택을 할 차례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수익을 극대화하려면 대출의 규모가 큰 블록의 고객층부터 공략하는 게 좋겠네요.”
그런데 막상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잖아요?
SOHO 고객군은 기회의 규모는 컸지만 경쟁이 치열했고, 거래 단위는 작았습니다.
반면 ME 고객군은 고객 수는 상대적으로 적았지만 기업당 거래 규모가 크고, 관계로 확장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질문이 좀 바뀌었습니다.
“여기가 더 큰 시장인가?”, 보다는
“여기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시장인가?”
한다고 다 되면 아마 고민이 필요없겠죠.
하지만 가진 바 역량으로 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성공 가능성이 높은 그룹을 찾아내는 검증 과정도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관계형 금융이 가능한 ME2/제조업군
빠른 실행이 중요한 SOHO군
그룹별 시장의 규모는 알았으니, 여기에 고객별 특성과 니즈를 붙여 보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강점, 약점과 비교해서 기회 요인과 가능성 정도를 판단해 보는 거죠.
(기회 요인을 파악하는 데에는 지난 회에서 설명한 SWOT 분석을 함께 활용하면 도움이 됩니다.)
이때부터 전략이라는 게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타겟 고객군이 정해지고 나면 같은 상품도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고객별로 니즈가 차이가 있으니, 같은 대출인데도 고객에 따라 상품의 어떤 점을 강조해야 할지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보통 세일즈 포인트라고 부르죠, 이걸 그룹별로 이제 정리할 차례입니다.
ME 고객군은 금리와 한도를 가장 중요하게 봤습니다.
특히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얼마까지 대출이 가능하냐”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쪽에는 이런 요소가 중심이 됩니다.
정교한 금리 구조
충분한 대출 한도
RM 중심의 관계형 영업
반면 SOHO 고객군은 또 좀 달랐습니다.
소규모 자영업을 운영하다 보면 지금 당장의 자금난을 신속하게 막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거든요.
속도
편의성
긴급 대응
그래서 ‘Speed Loan’이라 이름 붙인, 빠르게 실행되는 승인 프로세스를 탑재하니 훨씬 호응도가 높았습니다.
같은 상품인데, 설명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야 했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상품이 아니라, 선택의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런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나니 같은 숫자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어떤 고객군에서는 수익이 나고, 왜 어떤 고객군에서는 문제가 반복되는지. 또 어디에 자원을 더 써야 하는지.
이게 조금씩 정리가 되는 것 같았어요.
시장을, 대상 기업을 몰랐던 게 아니라, 뭉뚱그려 같이 보고 있었던 겁니다.
나누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 않으면 전략은 흐려집니다.
STP는 그 선택을 조금 덜 흔들리게 만들어 주었던 틀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