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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Mar 21. 2024

엄마 제발 언니 좀 봐요

언니가 또 이상해

        

언니가 수상하다. 우리는 치매 여행을 통해 친정엄마가 지극히 정상범주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셋째 언니만 여전히 엄마의 치매를 포기하지 못했다. 언니는 홀로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도 된 것처럼 치매 부모를 둔 자식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연세 때문에 깜박 잊는 일이 늘긴 했어도 자식들과 식사약속이나 복지관에서 가는 단체여행 등 자신의 즐거움이 약속된 만남은 귀신처럼 기억하시는 엄마지만 언니는 엄마가 사는 집안 곳곳에 가스 불 잠글 것, 약 먹을 것, 음식물 쓰레기 버릴 것 변기 물 내릴 것 등등 공지사항을 도배했다. 언니의 행동은 어떤 신념 같았다. 엄마를 더욱 보호해야 약함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기댈 거라는 신념.


신념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엄마였다. 엄마가 구순이 가까운 연세에도 독립적으로 사실 수 있었던 건 특유의 탈탈 터는 성향 때문이다. 집안은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설거지 정도, 말 벗 정도가 엄마 집에서 할 일의 거의 전부다. 조금 더 젊었던 엄마는 자식들이 돌아간 뒤 설거지마저 다시 하곤 했다. 그러나 셋째 언니는 달랐다. 이불 빨래며 화장실 청소며 찌그러진 냄비 교환이며 엄마가 미쳐 버리지 못하고 끼고 있는 것, 깜빡 잊고 놓친 것을 찾아 내 살림처럼 처리를 했다. 어찌 보면 엄마에겐 가장 유용한 사람은 셋째 언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직도 셋째 언니가 아닌 다른 자식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린다. 낙심한 언니는 필요할 때만 자신을 찾는 엄마에게 염증이 난다며 엄마 곁을 떠났다.


한 달 살기를 떠나 거기 그대로 눌러앉아 버린 언니. 가족과 멀어지고 싶다는 이유를 댔지만 나는 그게 언니의 관심법이란 걸 안다. 예상대로 언니는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이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고 그곳 풍광이 끝내 준다며 매일 놀러 오라 종용했다. 행여 데리러 오라는 신호인가 싶어 생업을 닫고 내려갔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우울에서 벗어나 잠시 평온했던 언니 마음에 조증세가 깃들더니 이제 완연히 자리를 잡았다. 바다만이 자신을 위로하고 바다를 보는 걸로 행복하다 말하는 언니는 조증이 기력을 다하기 전에는 회유되지 않을 것이다.  


조울증은 양극성이다. 폐쇄와 개방, 풍요와 빈곤을 반복하며 깊어지고 옅어진다.. 언니가 말을 끊으면 집안 창문이 닫혔고 어둠 속에서 섭생이 무시되었다.  반면 창문이 열리고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빠졌던 살이 오르고 자신감이 마음처럼 몽실 불어난다. 조증이 다시 시작된 언니. 우리는 언니를 보지만 언니 눈에는 우리와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언니만 아프다.





최근 엄마는 황반 변성으로 요양등급을 받아 요양 보호사 케어를 받았다.  셋째 언니는 매일 세 시간씩 엄마의 말벗이 되어 주는 그분을 깔끔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기어이 잘랐다. 그 과정에서 등급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던 큰 언니의 빈정을 샀고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우리가 요양보호사에게 원한 건 단순했다. 밤새 별고 없었다는 사실 확인, 그거면 충분했다. 매일 들여다볼 수 없는 각자의 사정들을 대신해 엄마의 안위를 확인해 달라는 차원, 하지만 셋째 언니는 달랐다. 언니는 마치 자신의 자릴 넘보는 자에 대한 징계처럼 빠르고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셋째 언니는 요양 보호사를 쫓아낸 집에 CCTV를 설치했다. 다른 형제 의견을 제거하고 자신의 의견만 남긴 CCTV, 그걸로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언니는 화면에서 엄마가 사라지면 즉시 확인했고 확인이 안 되면 파출소와 노인정을 비롯해 사방 어디고 연락을 취했다. 엄마와 멀어지고 싶어 떠난다는 말과는 다른 조바심이었다. 거기까지면 좋았을 거다. 문제는 그런 행동들이 주로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이라서 얼마 남지 않은 신뢰마저 잃고 있다. 단합된 마음으로 셋째 언니를 구해냈다는 우리의 뿌듯함도 다시 시작된 병증 앞에서 처음의 순수성을 잃었다. 이제 우리는 엄마가 치매라거나, 행방불명 됐다거나 등을 알리는 언니의 연락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나는 유독 엄마에게 집착하는 셋째 언니를 보며 언니의 마음 병이 엄마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언니의 사고체계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엄마의 인정 한마디면 금방이라도 나을 것만 같다. 어느 날 나는 작정하고 엄마를 찾아갔다. 먼저 이런저런 근황을 꺼내 엄마의 비위를 맞춘 뒤 셋째 언니 이야기를 꺼냈다. 셋째 언니의 착한 성품, 억울한 입장, 엄마를 향한 역할을 칭찬하며 엄마의 합류를 이끌었다. 엄마도 어느 정도는 수긍했다. 그러나 엄마의 인정은 세 마디를 넘지 못한다. 험담은 열 마디에도 지치는 법이 없는 엄마다. 셋째 언니의 마음 병은 엄마 책임도 있다는 투로 말을 비춰보니 펄쩍 뛰고 화재를 돌리는 엄마. 결국 짐작만 했던 엄마의 진심을 확인한 꼴이었다.


셋째 언니가 포항으로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난 후 엄마는 매일 찾던 언니가 오지 않자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듯 허전하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언니가 머문 곳을 동경하게 된 엄마는 누군가 자신을 언니가 살고 있는 바닷가로  데려가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곳을 실상이 과정 된 것임을 에둘러 전하자 바로 포기했다. 엄마가 궁금한 건 장소였을 뿐 셋째 언니가 아니었다.

 

화와 술, 우리 셋째 언니에게 보이는 조증의 시작 징후다. 때 없이 내는 화를 잠시 피하면 언니는 그 사실로 다른 화를 만드는 동력으로 쓴다. 그렇게 풀 곳 없는 언니의 화가 쌓이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과 만나야 할 것이다. 나는 셋째 언니의 화가 순하게 지나가기를, 병증으로 심각하게 진도 빼지 않기를 기도하면서도 그 대가가 더 세게 찾아올까 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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