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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Mar 28. 2024

엄마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가장 오랜 동거- 장녀 콤플렉스

오십 중반이 될 때까지 나는 엄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부모라는 사실은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불변의 끈끈이어서 분리해 생각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 의식 속에는 부모, 특히 엄마라는 이미지에 포장된 고유성을 들추면 지탄을 받을 거라는 막연한 죄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다 지인이 낸 책을 보게 되었다. 엄마라는 이름이 절대 권력이 된, 그 이름 아래 실제적 폭력과 희생을 강요당했던 경험 담이었다. 책을 덮었을 때,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신의 병마저 권력의 도구로 활용했던 그분의 딸로 지낸 지인의 삶이 너무 안쓰러웠다. 정작 그분은 담담히 회상하고 담담히 배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를 넘어섰노라고 회고했다. 책의 결론은 자신을 낳아준 생물학적 엄마가 아니라 한 여자의 일생이라는 인문학적 타자화를 통해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간증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내 형제 중에도 그 분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내 큰 언니다.



엄마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큰 언니가 말했다.


큰 언니는 엄마가 계신 노인 카테고리에 제일 먼저 합류한 자식이다. 홀아비 사정 과부가 알듯, 노인 대 노인으로 누구보다 엄마를 더 잘 이해해야 할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동안 나는 큰 언니말이라면 무조건 공감하는 편이었다. 인생 참고서를 미리 보는 느낌이랄까, 내게 큰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방금 전까지 우린 엄마집에 함께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언니의 불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가 차에 오르고 토하듯 쏟아내는 불만을 들은 후 에야 내 무딘 감각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 시간을 되감아 보았다. 아파트 마당을 담은 백미러에선 손을 흔드는 엄마가 점점 작아지지만 내 기억회로엔 아직 납득할만한 사건이 발견되지 않는다. 언니의 토악질은 멈출 기미가 없고 꼭짓점을 찍는 데 걸린 시간은 백미러에서 멀어지던 엄마가 완전히 사라진 시간과 멀지 않다.


엄마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러는 건데. 내 목소리에서 주눅 든 나를 느낀다. 나는 언니가 그 말을 뱉기 전, 그 말이 내 귀에 화살로 꽂히기 전, 엄마의 거실로 순간이동 하고 싶다. 그러면 나는 볼일을 핑계로 언니보다 먼저 엄마 집을 빠져나올 것이다.


저 앞에 큰 언니가 내려야 할 곳이 보인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하는데 언니의 불만 수위가 여전히 그대로다. 우리 사이엔 어떤 조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니는 동조하지 않는 나조차 꼴 보기 싫다는 듯 차문을 부서져라 닫고 지하철 입구로 사라졌다. 멍한 눈으로 언니를 삼키는 지하철 입구를 바라봤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 근처지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나는 한 가지 다짐을 찾은 후 천천히 차를 이동시켰다. 당분간 언니를 보지 말아야지.


가족이 원망의 대상으로 소환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러나 드러냄과 삼킴은 다른 문제다. 더구나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폭탄 급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나도 가족을 원망하곤 한다. 한두 번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누구든 쌓인 원망을 배설할 대상과 통로가 필요하다. 언니들이 대상이 되었을 때 나는 여러 가지로 심사가 불안한 때였다. 자존심은 구겨진 지 오래고 그 자존심으로 언니들이 나를 방치한다고 오해했다. 혼자 우울하고 혼자 서러웠던 시간이 영겁처럼 길었다. 그러나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만난 언니들 눈에 내 영겁의 설움 따윈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언니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듯 언니들과 나 사이에는 꾸준히 아니 어쩌면 영원히, 깨달음의 간극이 존재할 것이었다. 또 어쩌면, 이해한다는 말은 선경험이기에 앞서 더 깊이 생각한 사람의 결론인지도 모른다.


에게! 그건 약과야. 넌 아직 멀었어, 너도 내 나이 돼 봐. 자식새끼 다 소용없다고 몇 번을 말해. 서로 말허리를 자르며 설움 전쟁을 벌이는 언니들을 보고 있으면 약해진 언덕이 보였다. 한 때 바위 같던 내 비빌 언덕들은 내 하소연 한 줌이면 주룩 흘러내릴 모래 언덕으로 풍화되는 중이다.


언니들 안중 밖에서 나는 하소연 의지를 조용히 접었다. 이제 이 세상에는 내 하소연을 받아 줄 언덕이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이 쓸쓸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다면 내가 언니들 언덕이 돼 줄 때가 온 건가 싶었다. 그러나 내 마음엔 언니들이 들어올 한 뼘 공간이 없다. 여유가 만드는 마음 공간. 내 사정은 좀처럼 여유를 회복하지 못했다. 나는 혼자의 시간을 가져 마음 공간을 만들어 보려 했다. 원망이 자리한 공간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언니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타인은 미쳐 비우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여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의 교집합 엄마. 필연적 공통분모를 지니지만 자식에 따라 보이는 면과 인식도 달라지는, 자식이 내민 저울의 고정된 한 측에서 끊임없이 저울 질 당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 이름 엄마. 큰언니는 노년의 엄마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토양에서 나고 자란 미움에는 주변을 전염시키는 못된 확장성이 있다. 셋째 언니에서 시작된 미움이 큰 언니를 거쳐 내게 왔을 때 나 또한 면역력을 잃고 말았다. 나는 이제 엄마도 큰 언니도 밉고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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