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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Apr 04. 2024

기둥의 아픔

큰 딸의 반란

엄마의 첫 딸, 큰 언니는 고장 난 저울에 균형을 맞춰 동생들을 다독이던 사람이었다. 절대 지존인 장남의 기를 살려주는 일부터 가장 늦게 가족에 합류한 막내 올케에게 납작 엎드리기까지의 처신은 분별이 정확하고 알맞았다.


마흔다섯 늦은 나이에 결혼한 올케는 동생과 동갑이다. 동생은 결혼에 뜻이 없었다. 대학 겸임으로 제 몸하나 겨우 건사할 밥벌이 때문인지,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부정감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 결혼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다 기적처럼 올케를 만났다. 올케 역시 자기 사업을 일구느라 혼기를 놓친 상태였다. 그러나 둘 다 초혼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올케가 아까운 조합이다. 우리는 자유분방하다 못해 문제아처럼 보이는 동생을 품는 성품에 납작 엎드리는 걸로 편들고 있다.


내게 큰 언니는 두 번째 엄마 같은 존재다. 언니는 내가 중학교 때 결혼했다. 집을 떠나는 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니의 행복을 속으로 응원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내 바람과 거리가 멀었다. 집안 형편에 맞춰 처지가 엇비슷한 혹은 그 보다 살짝 낮춘 언니의 선택은 불행해 보였다. 언니는 끝내 참았다. 평소엔 얌전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난폭해지는 형부, 처지를 알게 된 오빠가 남은 생을 책임지겠다며 이혼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언니는 이미 한 집안의 시작점인 맏딸의 위치와 기둥으로서 먹줄* 의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 형부라는 호랑이 발톱도 무디어지고 참고 견딘 언니 삶도 안정을 찾아갔다. 안정된 삶에서 언니는 잿더미에 묻힌 학구열을 꺼냈다. 언니는 특수학교를 통해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일사천리로 해치우더니 만학도 전형까지 진도를 빼 마침내 대학생이라는 큰 꿈을 이뤄냈다..


삶에 기죽어 살던 언니는 공부를 거듭하며 기세의 날개를 펴는 듯했다. 졸업 후에도 방통대를 다시 다니며 학생 신분의 끈을 이어갔고 공부 재미에 빠져 지내는 사이 책도 내고 커뮤티티 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바쁜 시간을 살았다. 즐거운 노후를 보내는 언니가 부러웠다. 그런데 최근 언니 행보는 부럽지가 않다. 오히려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너 하구 나만 병신이었던 거야.


 마음의 병으로 아픈 셋째 언니를 가장 많이 보살핀 사람이 큰 언니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동거하듯 셋째 언니 거처에 머물며 같이 밥 먹고 함께 소풍을 다니는 방식으로 곁에서 편이 돼주는 큰 언니를 모두 고마워했다. 하지만 거기 까지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셋째 언니의 조증 재발에 큰 언니 역할이 있다고 의심한다.


우울증에서 깨어날 때 셋째 언니는 고마워. 미안해. 조심해서 가. 이 세 마디가 말의 전부였다. 평범한 그 말이 언니 목구멍을 통과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충분히 기뻤다. 우리는 셋째 언니로부터 더 많은 말을 끌어내기 위해 자꾸 모였다. 우리가 주로 말했고 셋째 언니는 듣기만 했다. 특히 큰언니 수다가 보람 도파민이 되어 쉼 없이 쏟아졌다. 얼핏 셋째 언니의 가까운 미래에 밝은 세상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다 흐름에 이상 기운이 감지됐다.


큰 언니에게는 말을 맛있게 하는 재능이 있다. 심각한 상황이나 어색함도 말의 힘으로 무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같이 있는 상대를 쉴 새 없이 웃게도 해준다. 그 재능이 셋째 언니의 말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큰 언니 말에서 유머가 빠지기 시작했다. 유머가 거세된 말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고 위험해 보였다. 위험한 말이 홍수로 변해 집안의 과거사를 휩쓸기 시작했다. 강바닥에 내려앉은 과거사가 부유물처럼 뒤집혀 셋째 언니의 현실에서 부유했다. 큰 언니만 경험했던 우울 기억이 그렇게 셋째 언니 귀에 쏟아졌다. 너하고 나만 병신이었던 거야,라는 말뜻은 어린 날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찬밥 취급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이었다.


*먹줄: 먹통에 딸린 실 줄로 먹물을 묻혀 곧게 줄을 치는 데 쓴다. 집 짓기나 인테리어 작업에 쓰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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