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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Apr 18. 2024

노인이 된 언니

엄마 닮았네

치매여행에 동행했던 조카가 많이 아프다. 조카는 어릴 때부터 게임에 정신을 팔았고 더 많은 시간 확보를 위해 인스턴트를 장복했다. 그게 원인이 되어 비만을 비롯한 여러 병증을 얻었다. 삶의 질은 극감 했고 원인을 찾아 여러 검사를 거치는 동안 큰 언니는 자주 울었다. 두려움이 변한 눈물이었다.


큰 언니가 엄마에게 분심을 높일 때는 아픈 조카 때문에 마음 부침이 심한 시기였다. 조카의 유년에 언니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조카를 보호할 힘이 없었다. 언니 자신도 두려움에 떨며 생업 또한 짊어져야 했기에 삶은 늘 전전긍긍 허덕였다. 본보기 없이도 자존감이 높았던 큰 언니의 자의식은 결혼생활에서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검사결과 조카의 병증은 죽음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는 안도했다. 안도의 큰 숨을 내 쉰 지 얼마 후부터는 두려움도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억눌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새끼를 살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서러움으로 변한 것이다. 죽음은 면했으나 평생 관리가 필요한 조카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언니에게 푼다고 했다.


엄마에게 무슨 억하심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언니는 자식에게 받은 설움을 엄마에게 전가하려 했다. 마흔 줄에 들어선 자식의 생활비까지 책임지는 언니의 노년. 스스로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 자식을 어쩌지 못하고 꼬박 뒷바라지를 해오던 언니였다. 반면 엄마는 아픈 손가락을 밀쳐도 다른 자식들로부터 받는 용돈으로 여유를 누렸다. 그런 엄마에게 알 수 없는 화가 났다. 어쩌면 질투인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그날은 엄마 집에 모이는 날이었다. 건강하던 엄마는 갑자기 눈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노인성 황반변성이었다. 치매걱정에서 벗어나 안심했는데 흐릿한 세상을 만난 엄마를 계속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인 김에 냉장고를 정리하기로 했다. 사물의 구분은 물론이고 멀쩡한 것과 상한 것의 분별이 정확하지 않은 엄마의 냉장고는 포화상태였다. 냉동실은 비닐봉지에 담긴 식재료들이 쏟아질 듯 차례를 기다렸고 냉장 칸엔 유통기간이 지나거나 상하기 직전인 음식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기 살림을 휘젓는 게 싫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멀쩡한 걸 버린다며 구시렁 거리시기도 했다. 우리가 가져가서 먹을 거야. 버리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건 버려야 해, 안 보인다고 막 드시면 큰일 나요. 엄마는 다른 무엇보다 음식물이 버려지는 걸 아까워하셨다. 우린 엄마에게 둘러대면서 각자 음식을 챙겼다. 큰 언니는 챙긴 건 갈비찜이었다. 그건 먹게 놔둬. 엄마가 말했다.


죽을 때 싸가려고 그러나. 먹을 게 천지인데 자식 먹는 것도 아까워 썩을 때까지 움켜쥘 노인네. 큰 언니는 엄마 집을 나오자마자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노인네라고 험담의 물고를 튼 후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핵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노인이 된 언니는 여러 면에서 예전과 달랐다. 집안의 중심이었던 언니는 비난 화살을 엄마에게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유년이 엄마와 동생들에게 희생당했다는 주장에 토를 달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화살을 쏘았다. 셋째 언니를 경험 삼아 큰 언니의 아픔도 받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빚 독촉하듯 독을 묻혀 겨누는 화살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새삼 셋째 언니의 통증이 이해되었다. 다른 한편으론 큰 언니 역시 걱정되었다. 나의 두 번째 엄마, 큰 언니의 공은 쓸쓸히 빛을 잃어갔다.


몇 해전부터 큰 언니는 트롯 가수에게 빠져 산다. 미스터 트롯에 나왔던 가장 어린 가수였다. 몇 십만 원에 달하는 콘서트 티켓도 서슴없이 구매하고 집안에는 연두색 물건들이 그득하다. 연두는 그 가수의 표시색이다. 반찬 값을 아끼기 위해 재래시장을 주로 이용하는 언니의 그런 행동이 놀라웠다. 마음 전부를 그 가수에게 몰빵 한 언니는 그의 노래에 큰 위안을 받으니 그를 위해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 때나 그의 노래를 튼다. 때 없이 퍼지는 그의 노래가 소음으로 느낀 나는 그에게 반감이 생겼다. 그 감정이 전해져 언니의 미움을 샀다.


섭섭함. 젊을 때는 아주 또렷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감정에 오래 붙들리진 않는다. 새롭게 펼쳐지는 삶 속에 풀어야 할 숙제가 계속 생겨 숙성 전에 각질이 되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 느낀 섭섭함도 곱씹는다. 섭섭함에서 서러움으로 서러움을 다시 분노로 형질을 변환시키는 언니의 감정이 스스로 삭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 했으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을 거듭하다 엄마와 닮은 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가족은 그렇게 얽히고설킨다.


나이가 드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젊은이들 눈치를 보게 된다. 치사한 마음이 들만큼 마음을 비워보지만 돌려받는 이해는 양에 미치지 않는다. 차라리 말 통하는 동년배와 유유상종 어울림이 백 번 편하지만 저희들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반박을 들을까 시선을 완전히 거두지도 못한다. 이래도 저래도 나이 든 설움뿐이다. 하지만 설움을 겪는 과정은 늙어가는 부모를 더 정직하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그 영원한 평행이 인생임을 깨닫고 앞으로 살아갈 날의 마음가짐을 또 한 번 고쳐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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