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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떼굴 May 02. 2024

원래 그런 사람, 우리 엄마.

그때 엄마는 왜 그랬을까?


유년 기억에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건 매를 휘두르던 엄마다. 마당 빗자루, 아궁이 옆 부지깽이, 반짇고리 속 나무 줄자는 엄마 손에서 무서운 회초리로 변하곤 했다. 그때 우리 집 누군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를 맞았지만 나는 매 맞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엄마가 특별히 나를 봐주었을 리도 만무하다. 엄마는 심기를 더 먼저, 더 많이 건드린 자식을 우선적으로 때렸다.


악을 쓰며 때리는 모습만 떠오를 만큼 엄마로부터 칭찬받은 기억 또한 없다. 칭찬에 인색한 엄마는 중3 여름, 첫 생리를 어렵게 고백한 나를 혼냈다. 결혼을 하고 두 달 뒤 임신사실을 알렸을 때도 엄마의 첫마디는 뭐가 급해서 벌써 하고 애를 갖고 난리, 였다. 생리는 부끄러운 일이고 임신은 잘못된 선택으로 착각하게 만든 우리 엄마. 웬만해선 자식들을 향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생신상을 의논하면 수선 떨지 말라 했고 선물을 하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역정을 내던, 미안한 마음을 그리 표현한다고 짐작할 뿐 엄마의 정확한 진심파악은 언제나 어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생일상보다 만족스러웠던 엄마는 생일상은 받고 가시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에게 자식이 있다 드냐 없다 드냐. 여행 전 미리 모여 생일밥을 먹지만 생일 당일에 축하 전화가 없다고 부아를 터트린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우세 떨 기회를 놓친 분풀이. 이후 여러 이유로 느닷없는 분풀이를 경험해야 했다.  


엄마는 대체 왜 그랬을까

누군가의 실체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근간으로 상상력을 보태 만들어진다. 엄마의 실체 또한 나의 기억과 언니들의 증언이 더해져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퍼즐결론 내린 내 의식의 초상이다. 모두의 엄마지만 자식들의 경험과 시절이 각기 다르니 엄마의 초상도 자식 수만큼 존재할 거다. 그러므로 내 엄마는 일곱 개의 초상을 가진 사람이다.  


에미에게 자식은 낳는 순간부터 목숨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소중히 키워도 자식에게 남겨진 기억은 부모와 기억과 차이가 크다. 그 나이에 그걸 했다고? 툴툴대기만 하던 딸은 결혼 2년 차부터 나에 대한 평가에 후한 점수를 주기 시작했다. 나는 스물다섯에 첫 아이를 낳았다. 딸은 그때의 내가 안쓰럽다고 동정했다. 난 엄마처럼 못할 것 같다고. 아이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딸은 고민이 많다. 딸은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봐야 아는 나이다. 나의 어린 날도 그랬다. 찍어 보고 아는 눈으로 나를 단죄하던 날들을 까마득하게 잊은 딸의 지금이 고맙다.


내 엄마는 나보다 더 어린 스무 살에 엄마가 되었다. 3년 터울로 7남매. 임신 기간만 7년이다. 이십 년을 아이에게 치여 살았던 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처음 엄마가 된 사람이 본능에 의지하는 것 말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본보기였을 외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이제 그만 엄마를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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