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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 Sep 23. 2024

낭만주의,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그저 나 자신인 채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염원이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가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모습마저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괴로움을 수반하는 일임에도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찾고 난 후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적으로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눈에 보이는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도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독일의 철학 사조 역사에는 무의식과 환상의 세계를 탐구한 사조가 있다. 그것은 보편적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하려 했던 계몽주의 사조에 반기를 들며 등장한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간의 이면(Nachtseite)을 부각함으로써 인간적 존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하였다. 단순히 이성을 통한 감각세계의 해석만으로 얻게 되는 세계상은 세계의 부분적 표현에 불과하며, 그로 인하여 세계의 심오한 내면은 여전히 인식의 권외에 남게 되므로,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내면은 환상에 의해서만 투시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본 글은 이러한 낭만적 세계관이 물질적 세계관 그 너머를 투사하려고 시도했던 동양의 불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인지에서 시작되었다. 독자적인 자기 동일성이나 자성을 지닌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인데, 이것과 현실생활과 경험세계 바깥에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을 벗어난 저 멀리 있는 무한성으로의 해탈을 시도하는 낭만적 세계관을 결합하면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시도 중 하나이다.


   또한 무의식의 세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ismund Freud. 이하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도 낭만주의의 궁극적 지향점과의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꿈의 해석』에서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 활동에 대하여 분석했으며 무의식에 깃든 개인의 욕구를 발견하여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감각과 이성을 통해 파악한 현실 세계만으로는 세계의 본질을 알 수 없기에 환상과 성찰을 통해 성숙한 자아를 찾아내고자 하는 낭만주의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본론과 결론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과 불교적 세계관이 낭만주의의 세계관과 어떤 점에서 맞닿아 있는지 각각 분석해 보고, 궁극적으로 ‘아이러니(irony)’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나 자신, 즉 실존적 자아를 찾을 수 있음을 역설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낭만주의의 기본 사상


   낭만주의는 ‘낭만적인 것(das Romantische)’을 쫓는 사조다. 낭만적인 것이란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직시하는 것이 아닌 과거와 미래, 불확실함을 보고 있는 과정의 총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이성을 가진 사람인 이상 이 세계 안에서만 과도하게 몰입될 수밖에 없는데, 낭만주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벗어나 거리를 둘 것을 강조한다. 이는 현실도피와는 다르다. 한 걸음 물러서 제3의 시선으로 세계로 나 자신을 성찰해 본 후, 이 동력을 통해 현실을 다시 살아가야 한다. 몰입과 성찰을 반복하고 감성과 이성을 반복하는 것, 즉 어떤 개념이나 실체를 한 가지로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까지 파악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행위인 것이다. 이를 통해 낭만주의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과 가능한 모순의 절대적인 통일이다. 이는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이중성을 보는 것. 이것은 수학의 집합론에서 두 집합이 공통으로 포함하는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인 교집합(interseciton)의 개념과 굉장히 유사하다. 대표적인 낭만주의 철학자인 노발리스(Novalis)의 낭만화 정의에 이러한 인식이 잘 나타나있다.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낭만화란 질적 강화에 다름 아니다. 흔한 것에 높은 의미를, 평범한 것에 비밀스러운 모습을,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을, 유한한 것에 무한하다는 외양을 부여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낭만화하는 것이다 “.     


   이것이 노발리스가 말한 낭만화의 의미이다. 우리가 이성을 통해 판단 내린 것을 해체하는 작업이며, 낭만화를 통해서만이 세계의 본질과 진리에 가닿을 수 있다는 인식이다. 정리하면, 이입과 거리 두기를 활용하여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믿는 무언가를 새로운 각도로 직면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모든 세계와 더불어 자기 자신까지도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기본 전제이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프로이트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뜻밖의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인간 행동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는다. 의식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는 영역이지만, 무의식의 영역은 그보다 깊은 층위로써, 개인이 경험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는 영역이다. 의식의 목소리와 무의식의 목소리는 같은 경우도 있지만 정반대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무의식의 목소리를 분석하는 것이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내면에 각인된 기억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외부로 분출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내면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야만 성숙한 개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감정을 ‘두려운 낯섦(unheimlich)’이라고 표현하였다.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지만 현재 내 언어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친숙하지 않은 것, 일종의 공포감을 의미한다. 에른스트 호프만(Ernst Hoffmann)의 작품 『모래사나이』 속 인물 나타나엘은 어릴 적 들었던 모래사나이 이야기를 공포의 대상이자 매혹의 대상으로서 내면에 상정하며 모래사나이를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어릴 적 경험이 현실과 이야기 사이에서 변주를 반복하며 무엇이 실체인지 알 수 없게끔 나타나엘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를 최면, 꿈, 전반적인 실수 행위, 신경증적 증상과 행동, 그리고 비합리적인 행동 등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말과 행동 그리고 꿈을 분석해 보면서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를 세밀하게 성찰해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정상을 정의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삶 속에 정해진 것은 없으며 우리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들이라는 것을 정신 분석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것은, 개인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부’가 아닌 ‘전체’로서의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해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 개념세계와 그와 모순된 개념의 교집합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려 했던 낭만적 세계관과 매우 유사하다.




불교의 세계관


   불교의 세계관에서 공(空)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공사상이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이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인간도 우주 만물의 일부일 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하나의 도덕적, 사회적 기준에 맞추고자 하는 시도는 불교 교리에 맞지 않는다. 불교의 공사상을 잘 표현한 불교경전인 『반야심경(般若思想)』에는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즉, 추(醜)와 미(美), 악(惡)과 선(善)은 모순되는 개념이지만 사실 서로 다르지 않고 함께 공존한다는 것,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그 총체를 꿰뚫어 보라는 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므로 따로 정답을 찾거나 구할 필요 없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초기 대승불교의 핵심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와도 연결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지어내는 것”이라는 뜻으로, 진리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이 세상은 눈으로 인식되고 변화되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통해야지만 모든 것을 꿰뚫고 통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낭만주의에서 환상의 세계를 탐구한 것과 유사하다. 환상은 무의식, 내면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환상이란 단순히 자의적 유희를 넘어, 인간 정신의 한층 근원적인 능력이며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을 형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노발리스의 작품 『푸른 꽃』의 주인공 하인리히는 신비에 싸인 무한한 현실의 근원에 대한 동경의 상징인 ‘푸 른꽃’을 찾기 위해 꿈과 환상의 세계를 끝없이 누빈다. 끝내 그는 세계편력을 통해 그것을 찾게 되고, 사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푸른 꽃’, 즉 진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 속에 존재함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그가 한 여행은 먼 곳을 동경하면서도 결국은 항상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이었으며, 사람은 모든 것이 본원인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자기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세계 인식은 결국 자기 인식인 것이다. 이는 만물은 마음의 창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일체유심조’ 사상과 충분히 연결가능하다.


   한 편,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말씀도 있다. 산과 물을 진정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선 눈으로 보이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만물의 근본은 하나이므로 산과 물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산과 물은 단순한 감각적 인식 대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를 인정하고 나면, 인간이 ‘나’ 또한 우주 만물의 일부이므로 내가 알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산과 물, 그리고 내가 하나의 텅 빈자리에서 합쳐지게 되고 만물은 옳고 그름이 사라진 공간에서 무(無)와 유(有)의 측면이 같이 있음을 깨닫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명칭은 그저 그것의 이름일 뿐 본질은 아님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이는 낭만주의에서 말한 교집합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본질은 결국 어떤 이름을 부르든 관계없이 거기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서양의 교집합과 동양의 중도(中道)는 뜻을 같이 한다.

  이렇듯 불교에서 상정하는 ‘나’는 세계와 통하는 ‘나’이고 이는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적 구분을 전제로 한 주관성이 아니라, 세계와 융합된 전체성 속에서의 자아를 의미하는 낭만적 자아와 상당히 닮아 있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 사조들은 하나같이 인생의 ‘아이러니(irony. 모순, 역설으로 번역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꿈과 낭만주의의 환상은 불교의 해탈의 경지와 맞닿아 있으며, 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투시해 볼 수 있다. 각 사조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은 그 자체로 모순 덩어리이고 이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진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내 모습도, 내가 부정하고 싶은 내 모습도 모두 결합된 총체의 모습이 나라는 것, 즉 나 자신의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면으로 침잠하여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기존에 억압되고 분리되어 존재하던 나의 진면목은 관계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고 표현되며 마침내 통합된다. 단순히 외부의 자극을 느끼고 감상하는 것에서 그쳐있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받아들인 후 나만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것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현실의 문제점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 몰입을 하고 있는 인간의 시야는 매우 좁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낭만주의의 총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정답은 있다고 끊임없이 외쳐대는 세상의 억압에서 벗어나 내 안의 독창적인 세계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작품 『필경사 바틀비』에서 낭만주의의 메시지를 찾는다면 단연코 “안 하는 편을 (선) 택(I prefer not to)” 하겠다는 바틀비의 말일 것이다. 단순히 어떤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부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지 않음을 선택하겠다는 긍정의 표현이다. 이는 ‘존재하거나 행동할 잠재성’과 ‘존재하지 않거나 행동하지 않을 잠재성’ 사이에 있는 일종의 ‘비무장 지대’를 개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틀비의 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능동적이고 적극성을 띄는 선택의 행위와 수동적이고 부정성을 띄는 하지 않음의 행위가 같은 선상에 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이를 선택할 권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 바틀비는 분명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아는 인간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작품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구원자였던 데미안은 자기 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남기고 싱클레어 곁을 떠난다. 이렇듯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텍스트들에서 내면을 향한 성찰은 빠질 수 없는 소재이다. 비록 앞서 언급한 철학 사조들이 조금씩 결을 달리 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탄생한 철학들이 부분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한 개인의 삶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에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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