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렇게 색이 바랜 낡은 매트리스 위로 준태가 누워있다. 잠시 후 그 옆에 놓인 알람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7A.M. 깨어난 준태는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때가 낀 세면대 거울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반 곱슬머리, 쌍꺼풀 짙은 눈, 갸름한 얼굴. 코와 턱밑으로 수염이 새까맣게 올라와 있었다. 면도를 할까 하다가 면도기를 도로 머그컵에 꽂았다. 머리카락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는 머리를 감았다. 준태가 샤워를 끝내고 화장실을 나왔다. 물기 때문인지 그는 곧바로 한기를 느꼈다. 준태는 카고 바지와 남색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11월이었기에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준태는 시카고 다운타운 근처 로렌스길에 있는 작은 원룸에서 살았다. 아파트 주차장 주변에는 은행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들이 죽은 나비 떼처럼 보였다. 차를 몰고 가는 데 준태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우측에 나타난 패스트푸드점으로 그는 핸들을 돌렸다.
“웬디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종업원의 목소리가 드라이브 스루 스피커에서 나왔다. 그는 즐겨 먹는 머핀 세트를 주문했다. 음료수는 커피로 달라고 했다.
“5달러 79센트입니다. 두 번째 윈도로 오세요.” 생기 있는 목소리로 종업원이 말했다.
그가 두 번째 창구에 차를 대었다. 금발벽안의 백인여자가 머핀과 커피를 건넸다. 준태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봉투에서 머핀을 꺼냈다. 라디오헤드의 곡이 라디오에서 나왔는데 노래 제목이 생각날 듯 말 듯하다가 생각나지 않았다. 준태는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웅장하게 솟은 시어스타워가 멀리 보였다. 이십여 분을 달린 그는 흑인밀집지역인 사우스 사이드에 도착했다. 허물어질 듯한 단층 건물 벽에 허물어질 듯한 간판이 붙어있었다. Joy Beauty Supply. 차에서 내린 준태는 가게로 들어갔다.
“이제와?” 170 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옆머리가 희끗희끗한 고사장이 말했다.
“네 사장님, 근데 이발하셨네요?” 준태가 웃으며 말했다.
“마누라가 깎아줬어. 아직 아침 안 먹었지? 이거 좀 먹어.” 고사장이 말했다.
쿠킹오일이 번진 종이봉투 안에서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준태는 잘 먹겠습니다,라고 한 뒤 부리토를 집었다. 고사장은 전화기를 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시카고 불스 로고가 새겨진 벽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자 아르바이트생인 미리가 가게로 들어섰다. 그녀는 오리털 점퍼를 입었는데, 오늘따라 몸집이 더욱 커 보였다. 그녀는 미대를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일주일에 삼일 뷰티 서플라이에서 일을 했다. 고사장이 창고에서 나왔다.
“얘네들은 틈만 나면 도둑질하려 드니까 주의해. 어저께도 비싼 헤어 클리퍼 도둑맞았잖아. 암튼 난 약속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 게.” 그는 준태에게 말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준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리는 사무실 탁자에 놓인 맥도널드 종이백을 뒤적거렸다. 빈 봉투임을 확인한 그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쟤는 고갱을 좋아한다면서 체형은 파파로티를 닮으려고 하네. 준태가 헤어스프레이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오전 내내 가게를 찾는 손님이 뜸했다. 준태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디애나 게리 쪽으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왔다. 최근엔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렸다. 미리는 점심을 사러 간다며 가게를 나갔다. 준태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손님이 없는 날엔 시간이 세 배는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담배 연기를 코로 내쉰 뒤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는 가게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미리는 먹을 것을 잔뜩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사무실 식탁에 앉아 더블 치즈 버거 세트를 먹기 시작했다. 준태는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십 대 흑인 여자 네 명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단골인 크리스털이었고, 나머지 세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크리스털은 키가 아주 작았고 성냥개비처럼 마른 체형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덩치들이 컸다. 그들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중화제 향이 홀 안에 퍼졌다. 미리가 입술을 내밀고 뭐라 중얼거리며 카운터로 갔다.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준태 역시 홀로 나갔다. 크리스털과 남색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왼쪽으로, 다른 두 명은 오른쪽으로 흩어졌다. 좀도둑들이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즐겨 쓰는 전형적인 나비대형.
“너네 두비헤어 있어?” 크리스털이 준태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이쪽에 있어.” 준태는 카운터 뒤쪽에 걸린 두비헤어를 꺼내 들었다.
“얼마야?” 그녀는 헤어 피스가 담긴 박스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물었다.
“14불.” 준태는 대답한 뒤 구석 거울에 비친 두 명의 동태를 살폈다.
두 여자가 수상한 몸짓을 주고받았다. 준태는 미리에게 가보라고 눈짓을 보냈다. 미리는 음료수를 빨대로 요란스럽게 들이키며 구석으로 갔다. 그러자 두 여자는 주춤거리다가 다시 출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크리스털이 재빨리 말했다. “말리 브레이딩 헤어는 어디 있어?”
준태는 정면에 보이는 벽을 가리켰다. 크리스털과 남색스웨터가 투덜거리며 뒤쪽 벽을 향해 걸어갔다.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하지만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감시를 해야 돼. 틈만 주면 물건을 훔치잖아. 인간은 인간다움이란 게 있어야 돼. 다윈도 모세도 너희들을 보면 고개를 가로저을 거야. 준태는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결국 절도에 실패한 크리스털이 미간을 구기며 99센트짜리 싸구려 젤을 계산대에 놓았다.
“이게 다야?” 준태는 물었다.
“그래.” 크리스털은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준태는 젤을 비닐봉지에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크리스털과 일행이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가게를 떠났다.
짙은 코발트색 호수가 도시 위에 펼쳐져있었다. 심연 속에서 새들은 호숫물을 머리에 인 채 날아다니고 있었다. 준태는 엊그제 뉴욕에서 배달된 가발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리칼이 몇 올 없는 샤안티가 밝은 갈색 가발을 들고 왔다.
“이 가발, 검은색으로 있어?” 그녀가 물었다.
"잠시만.” 준태는 쇼 케이스 뒤로 돌아 들어갔다. "검정은 없고, 짙은 브라운색은 있는데.”
“그거라도 한 번 줘봐.” 샤안티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붉은 반점들이 나 있었다. 준태가 꺼림칙한 얼굴로 가발을 건넸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굴리며 가발을 썼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몸을 돌려가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초현실적으로 환상적이다. 니 원래 머리색 같아.” 준태가 과장된 톤으로 말했다.
“오케이, 이걸로 할 게.” 샤안티는 흐뭇하게 웃으며 앞쪽으로 갔다.
카운터에는 두 시간 전 미리와 근무 교대한 박현자가 서 있었다. 오십 대 중반인 박현자는 머리카락을 노랗게 염색했고 호피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와 샤안티는 지난주 토요일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가발을 세 개까지 써볼 수 있는 규칙에도 불구하고, 샤안티가 두 배인 여섯 개를 써본 게 화근이 됐다. 박현자는 원칙을 강조하며 샤안티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참다못한 샤안티가 박현자에게 중국으로 돌아가 버려, 이 쌍년아,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박현자는 진돗개처럼 펄쩍 뛰며 코리아도 아니고 차이나? 너나 아프리카로 돌아가 이 잡년아,라고 되받아쳤다. 준태가 겨우 중재에 나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었다. 샤안티는 앙금이 남아있는 듯 박현자를 째려봤다. 박현자도 질세라 눈에 불을 지피며 그녀를 노려봤다. 샤안티가 가발을 카운터 위로 휙 던지다시피 올려놨다. 가격표를 확인한 박현자가 입을 다문 채 말했다. “32달러 49센트.”
샤안티는 대꾸 없이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샤안티가 고개를 숙이자 산불에 탄 듯한 그녀의 정수리가 드러났다. 그걸 본 박현자의 입에서 피식하고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웃음을 화해의 제스처로 이해한 샤안티가 박현자를 따라 웃었다. 가발 진열대 앞에서 두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보던 준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문 닫기 삼십 분 전이 되자 준태는 창고로 들어가 현우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 준태야.” 현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냐?” 준태는 물었다.
“샴버그에 있어. 아는 형 만났는데 저녁 같이 먹고 방금 헤어졌다.” 현우가 말했다.
“아는 형 누구?” 준태는 물었다.
“주유소에서 몇 달 같이 일했던 형인데, 담 주에 형이 달라스로 이주를 하거든. 시카고에서는 도저히 더 이상 살 수가 없다네. 누가 들으면 곧 멸망할 곳처럼 말하더구먼.” 현우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오늘 맥주 한 잔 어때?” 준태가 물었다.
“나야 좋지.” 현우가 대답했다.
“오케이. 그럼 종이비행기에서 일곱 시 반에 보자고." 준태는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현우가 알았다고 했고 통화를 마친 준태는 다시 홀로 나왔다.
팔뚝에 장미 문신을 한 젊은 백인여자가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로 매장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무엇을 찾으시는지 도와드릴까요?” 준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여자는 선반에 놓인 포마데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그거 흑인남성용 제품인 건 알죠?" 준태는 말했다.
"알아요. 내 남자친구한테 주려고요.”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머쓱해진 준태가 카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