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Jang Sep 17. 2024

리글리 세탁소 (3/3)

3.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최 씨와 지현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로열 젤리가 묻어 있었다. 참고 인내하다 보면 남편이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녀는 도저히 밤잠을 이룰 수 없어서 벤조디아제핀계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녀는 남편만 믿고 모든 걸 뒤로 한 채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에 온 후 입고 싶은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그렇게 기계처럼 일을 했다. 그런데 남편이 조카뻘 되는 여자애 하고, 그것도 자신이 보는 눈앞에서, 그것도 그녀에겐 생명과도 같은 세탁소에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당장이라도 최 씨를 드라이클리닝기에 넣어 쪄 죽이고 지현은 다리미로 온몸을 지져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비싼 기계가 고장 날까 봐 생각을 멈췄다. 그럼에도 끝내 저것들을 죽이고야 말리라. 반드시. 치실로 치아 사이를 소제하며 아내는 복수를 다짐했다. 우선은 저 년이 사라져야 해. 저게 복숭아 같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니니까 저 미련한 인간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거지. 저 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라야 해. 아내는 일단 지현을 타깃으로 삼았다. 베깅일 뿐만 아니라 셔츠 다림질도 지현에게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셔츠 다리는 일은 지현이 하기엔 고된 일이었다. 일하다가 지치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아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최 씨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며 지현을 다정하게 쳐다봤다. 지현이 잘 다녀오라며 새색시처럼 말했다. 아내의 눈 속에서 자살테러가 일어났다. 저 년의 입을 쫘악 찢어 양 귀에 걸어놓아야 이 한이 풀릴 텐데. 아내의 마음속에서 행성들이 부딪히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윤경자.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그래 이 또한 참자. 그녀가 분노를 겨우겨우 억제했다. 눈치 빠른 지현은 최 씨 아내의 이런 격분을 감지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바지에 비닐을 씌웠다. 최 씨 아내가 구석에 있는 지현에게 가서 말했다. "지현 학생. 앞으론 말이야. 베깅만 하지 말고 남편이 없을 땐 다른 일도 좀 해줘." 아내가 차갑고 강압적인 톤으로 요구했다. "다른 일이라면 어떤 일을 말씀하는 거죠?" 지현이 카고 바지에 비닐을 씌우다 말고 물었다. 요년 봐라. 어딜 감히 표독스럽게 고개를 팍 돌려. 시너를 입에 처넣고 라이터로 확 불을 지를까 보다. 아내가 눈을 부라리며 지현을 노려봤다. "지현 학생도 알다시피 금요일엔 할 일이 많잖아. 그러니까 셔츠를 다려줘. 바지는 라울이 잘 다리고 있으니까." 그들의 대화 가운데서 자기 이름이 불쑥 나오자 라울은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야죠. 근데 아저씨도 이 사실을 알고 계세요?" 지현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아저씨도 알고 있느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무슨 시켜선 안 되는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왜 내가 남편에게 이런 것까지 얘길 해야 하지? 잠시만 뭐야 이건, 혹시 두 사람이 어떤 깊은 관계라도 돼서 내가 지현 학생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뭐 그런 말인가?" 아내가 피를 토하듯 격정적으로 대응했다. "말 나온 김에 하는데, 요즘 들어 나 두 사람 사이에 물음표를 인정사정없이 붙였어. 어디까지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눈치채서 알고 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은 자극하지 마. 다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내의 눈썹이 갈매기로 변해 미시간호 쪽으로 날아갔다. 지현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어차피 모두 밝혀질 거, 아줌마도 알고 있다니까 말할게요. 아저씨랑 나랑 어디까지 갔느냐고요? 우리 갈 데까지 갔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아세요!" 지현이 아내에게 소리쳤다.

"뭬야!" 아내의 입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그녀가 지현의 뺨을 후려갈겼다. 지현이 얼얼해진 뺨을 만지며 그녀를 째려봤다.

 "어딜 노려봐!" 아내가 지현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현이 비명을 지르며 최 씨 아내와 엉겨 붙어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그제야 라울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신고할 거야!" 지현이 휴대폰을 들고 외쳤다. "신고해라, 신고해! 이 쳐 죽일 잡년아!" 아내가 신발을 벗어 지현의 얼굴을 향해 던지며 고함쳤다.

십 분 정도가 지나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세탁소에 도착했다. 190 센티미터 정도에 체격이 거대한 흑인 경찰이 지현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후 최 씨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아내는 경찰차에 타면서도

여전히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라울이 최 씨에게 다급하게 전화했다.

최 씨는 나일즈에 있는 던킨 도넛에서 ‘문어발 청소용역 업체‘ 고사장을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최 씨의 눈 밑에 강렬한 경련이 일어났다. "왜 그래? 강도라도 들었어? 얼굴이 사색이 돼서..." 얼굴이 벌게진 채 안절부절못하는 최 씨를 보고 고사장이 말했다. 최 씨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후 도넛 가게를 박차고 나갔다. 최 씨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고사장이 냉큼 집어 들고 최 씨를 다급하게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최 씨의 BMW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막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부리나케 최 씨가 세탁소에 도착하니 지현은 구석에서 머리가 헝클어진 채 울고 있었다. 라울은 화장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변을 누고 있었다.

지현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최 씨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경찰까지 불렀냐며 지현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가 소리치자 더욱 굵은 눈물 줄기가 지현의 서러운 뺨을 타고 흘렀다.

"정말 미치겠다!" 최 씨가 비명에 가까운 소릴 지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내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유치장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본 최 씨의 눈이 뒤집혔다. 단단한 나일론실과 같은 죄책감이 그의 페니스를 칭칭 휘어 감았다. 경찰이 그에게 보석금 삼백 불을 내면 아내를 데려고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갑에서 이백 불을 꺼내 수납 창구로 갔다. 몸집이 거의 창구만 한 히스패닉계 여인이 수납처에 앉아 있었다. 최 씨는 현금을 그녀에게 주며 나머지 백 불은 신용 카드로 내겠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히스패닉 여인은 안쓰런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었다. 유치장 철문이 열리고 아내가 복도로 나왔다. 최 씨가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내에게서 약간의 땀냄새가 났다. 그녀는 즉시 그를 밀친 후 말없이 출구를 향했다.

"여보, 내가 죽일 놈이야.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여보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최 씨가 아내의 팔을 잡으며 애걸복걸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 없이 주차장에 있는 BMW로 걸어갔다.

차 문이 열리지 않자 그녀가 최 씨를 노려봤다. 그가 차 리모컨을 누르자 빼액, 소리가 나며 도어가 열렸다.  최 씨는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차에 탄 후에도 아내는 돌같이 굳은 얼굴로 멀리 차창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아내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최 씨의 불안은 고조되어만 갔다. 그는 차라리 예수가 재림해 오늘 밤 온 세상의 종말이 왔으면, 하고 생각했다. 최 씨가 좌회전을 하자 커다랗게 발기한 남근처럼 생긴 AOL 센터가 백미러에 비쳤다. 느닷없이 최 씨의 뇌리에 할 말이 떠올랐다.

최 씨가 아내 위로 올라갈 때마다 그녀는 피곤하다며 그를 밀쳐냈었다. 아내가 섹스를 거부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기에 왜 나를 거부한 거야. 지난 수년 동안." 최 씨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며 우측 방향등을 켰다.

"입 닥쳐, 이 개새끼야!" 침묵하던 아내가 즉각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녀의 반응에 깜짝 놀란 최 씨의 눈알이 황소의 그것처럼 휘둥그레 커졌다. 그가 이차선으로 레인을 변경했다. 옆 차선에서 달려오던 블랙 SUV가 경적을 울리며 상향등을 켰다. SUV 운전수가 최 씨를 추월하며 최 씨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선사했다.  

"언제부터야. 두 사람." 아내가 얼음송곳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충동적으로 딱 한 번 그랬어. 정말이야.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어난 일이었어." 최대한 처량한 얼굴로 최 씨가 말했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다고? Oh no, don't say that. 의지 없는 충동은 없어. 분명히 의지를 가지고 저지른 거야. 그러니까 회피하려 들지 마. 정정당당하게 그 대가를 치러." 아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최 씨는 싸구려 스웨터처럼 쪼그라들었다. "정당한 대가란 뭘 말하는 건데?"

"이혼할 거야.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젠 나도 나 자신만 생각할 거야. 다른 여자들처럼 쇼핑 가서 돈도 팍팍 쓰고 멋진 남자 만나 재미도 보고 그렇게 살 거야. 일 년 내내 세탁소에 처박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남편이랑 일하는 계집애랑 내 눈앞에서 그런 사이가 돼 버리고, 젠장 이게 무슨 개 같은 인생이야. 어차피 단 한 번 사는 인생, 이젠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 아내의 말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최 씨의 귀에 속속들이 박혔다.

"경숙이네로 가. 오늘 거기서 잘 거야." 아내가 글렌뷰에 있는 그녀의 친구 집으로 방향을 결정했다.

"여보 제발 용서해 줘. 우리의 주님도 용서를 강조했잖아." 최 씨가 정면 도로와 아내를 번갈아 쳐다보며 하소연했다.

"내 성격 알잖아? 구차하게 그러지 마. 나 이미 결정했어." 아내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정말로 끝... 끝났구나. 비탄의 호수 속으로 최 씨의 영혼은 깊이 수장되었다.

아내는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한 사례가 없었다. 그녀의 부모가 최 씨의 눈빛이 맘에 안 든다며 그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할 때도 최종적으로 아내가 던졌던 말이 나 이미 결정했어,이었다. 이제 아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예수가 재림해서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뿐이었다. 최 씨가 폭이 좁은 도로로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핸드폰을 꺼내 친구에게 전화했다. "지금 거의 다 왔어. 골프 로드 선상에 있는 버치 우드 아파트 맞지? 그래, 밑에서 벨 누를게." 아내가 통화 마침 버튼을 삐릭, 소리 나게 눌렀다."들었지? 골프 로드에서 좌측으로 꺾어." 그녀의 명령에 최 씨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젠 정말로 어찌한단 말인가? 지현이하고 같이 살아야 하나? 그럼 리글리 세탁소는 어떻게 하지? 분명히 빼앗길 텐데. 그럼 난 뭘 먹고살지? 수만 가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켰다. 이윽고 그들을 태운 BMW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내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최 씨는 비상등을 켠 채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웠다. 그는 핸들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차 보닛 위로 투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최 씨는 얼굴을 스르르 핸들에서 떼었다. 지현의 해맑은 미소와 그녀의 싱싱한 몸이 떠올랐다. 최 씨가 전광석화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 장탄식이 그의 입과 콧구멍으로 새어 나왔다. 주머니에 휴대폰이 없었다.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최 씨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전 02화 리글리 세탁소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