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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Jang Sep 24. 2024

시카고로 들어가다 (2/3)

2.

준태가 풀라스키길에 차를 세웠다. Paper Plane, Korean Bar. 초록색 네온불빛이 깜빡거렸다. 도로를 횡단한 뒤 준태는 바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제법 사람들로 붐볐고 벽에는 잭슨 폴록의 것 같은 그림이 몇 점 걸려있었다. 나무 바닥 군데군데에서 은은한 맥주향이 피어올랐다. 스피커에서 프로콜헤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이 흘러나왔다. 가죽잠바를 입은 채 현우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동그란 얼굴을 가진 그는 몇 달 전부터 누구의 영향을 받았던지 노리스 스키퍼 스타일로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그가 준태를 발견하고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준태는 주위를 훑어보며 구석으로 걸어갔다. 얼굴이 유난히 뽀얀 여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회색스웨터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 그녀는 상당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낯익은 여라도 있어?” 현우는 반대편에 앉은 준태에게 물었다.

"아니 그냥." 준태는 대답했다.

"난 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트리스가 와서 지체 없이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버드와이저 두 병 주세요.” 준태는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오늘 장사는 어땠어?" 현우가 웨이트리스의 뒷모습을 잠깐 본 뒤 준태에게 물었다.     

"요즘 엄청 슬로해. 매상이 점점 줄어 걱정이다. 가발그나마 몇 개 팔았지." 준태가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흑인들은 모자 대신 가발을 뒤집어쓰나 봐." 현우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후드 집업도 그렇고, 뭐든 머리에 뒤집어쓰길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여기 골뱅이무침도 하나 주세요.” 맥주와 팝콘을 가져온 종업원에게 준태가 말했다.

"지난번처럼 소라 몇 개 빠진 것처럼 말고, 큼지막한 골뱅이로 많이 좀 주세요." 현우가 종업원에게 말했다.  

종업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알았다고 하고 주방으로 갔다.

"저번엔 형편없이 나오더라고. 가격도 엄청 비싸게 받으면서. 서비스는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서 뭔 놈의 가격만 미래지향적이야." 현우는 투덜거리며 맥주병을 들었다.  

준태는 맥주를 마시며 회색스웨터를 바라봤다.  

"뭐야 자꾸, 디서 본 애야?" 현우 덩달아 준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아니, 오늘 처음 봐." 준태는 대답했다.   

준태가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린 회색스웨터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준태는 탁, 소리 나게 맥주병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회색스웨터 앞에 앉은 뿔테안경을 쓴 여자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뿔테안경이 상체를 숙이고 회색스웨터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회색스웨터가 준태 쪽을 바라봤다. 준태가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 하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그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내가 가볼까? 느낌이 오는 게, 가서 같이 놀자고 하면 될 것 같은데." 현우가 말했다. 

"착각하는 거 아니야? 괜히 갔다가 퇴짜 맞으면 창피해서 다른 데로 옮겨야 해." 준태가 말했다.   

"퇴짜를 오만 번 맞아본 사람은 오만 일 번째 퇴짜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현우가 말한 후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몇 초간 뜸을 들이던 는 작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가 여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넉살 좋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 정말로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태는 적잖이 당황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랑 합석하실래요?" 현우가 뿔테안경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현우를 올려다봤다. “왜요?” 뿔테안경이 물었다.

"미국 사는 한국 사람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현우는 대답했다.

그녀는 몇 초간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쪽들이 우리 테이블로 오세요." 뿔테안경이 했다.  

현우 준태에게 손짓했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준태가 맥주병을 양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색스웨터의 이름은 상희였고 나이는 준태보다  어렸다. “다운타운에 있는 패션스쿨에 다니고 있어요. 졸업반이에요” 그녀는 말한 다음 팝콘 소쿠리에 손을 가져갔다.

"어쩐지 옷 입는 센스가 남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웨터가 잘 어울려요." 준태가 말한 뒤 맥주를 마셨다. 상희는 그 말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상희의 친구인 민주도 같은 학교에 다녔다.  

"어쩐지 패션센스가 남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뿔테안경이 너무 잘 어울려요." 현우가 능글맞게 민주에게 말했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멘트도 둘이 똑같이 하네요." 민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종업원이 골뱅이무침을 가져다주었다. 골뱅이 양을 확인한 현우가 바로 이거, 라며 좋아했다.  

“여기 자주 와요?" 상희는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며 물었다.  

"자주 오는 편은 아니고 가끔 와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준태는 대답했다.

"준태씬 그럼 무슨 일 하세요?" 민주는 말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사우스 사이드에 있는 뷰티 서플라이에서 일해요. 가발하고 헤어제품을 파는 곳인데, 일한 지는 일 년이 좀 넘었어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대학에 다시 가 공부를 마치고 싶어요.” 준태는 젓가락으로 골뱅이를 집었다.  

“전 나일즈에 있는 고바우 식당에서 일합니다. 손님들 팁으로 연명하는데, 장사가 워낙 잘돼 하루에 팔십 불 정도는 법니다. 어제는 무려 백이십 불을 벌었고요.” 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상희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중학교 동창인데, 어쩌다 보니 일 년 간격으로 미국에 왔어요. 현우는 시카고로, 전 매디슨으로. 위스콘신대 다니다가 사정이 생겨서 학업을 중단하고 여기로 오게 된 거예요." 준태는 말했다.

상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위스콘신대요? 내가 아는 친구도 그 학교 다니는데."

"이름이 뭔데요?" 준태는 물었다.   

"진혁이요. 서진혁." 그녀가 대답했다.

한국 학생들이 워낙 많이 다니는 학교고, 내가 나이가 있으니까 나랑 그 사람이랑 학교를 다닌 시기가 겹치지 않겠죠. 근데 상희 씨랑은 무슨 사이예요?” 준태는 말한 다음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상희는 쑥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 사귀었던 사이예요. 그 친구메디슨으로 학교를 면서 헤어졌죠. 저도 그를 따라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시카고를 떠나는 건 불가능했죠."

그녀의 설명에 준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 대신 시카고를 선택한 셈이네요. 침울하기만 한 이 동네가 뭐가 좋다고." 현우는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전 여기가 좋아요. 갈 데도 많고 볼 것도 많고. 뉴욕하고 LA도 가봤는 데 난 여기가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상희가 현우에게 대답한 다음 준태를 바라봤다. "그런데 준태씬 여자 친구 있어요?”

"지금은 없어요. 있었다면 이런 자리를 갖지는 않았을 거예요." 준태가 대답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상희가 었다.  

“두 분은 영주권자예요?” 민주가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둘 다 아직까지도 학생 비자로 있는 상태예요. 실은 영주권 해줄 수 있는 스폰서를 찾고 있어요. 고바우 식당에서 해주면 좋겠는데 돈을 너무 많이 달라고 해서. 두 사람은요?” 현우설명하고는 되물었다.  

 “저희들은 정말로 학생이니 당연히 학생 비자로 있요.” 민주가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같은 건 안 해요?” 현우는 물었다.

“굳이 하려면 허가받고 할 순 있지만 안 해요. 아빠가 학업에 집중하라고 해서.” 민주는 대답했다.

 “전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상희가 말했다.  

“어디서요?” 준태가 물었다.  

“그건 비밀, 다음에 말해줄게요.” 상희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INS 직원들도 아니고, 우리끼리 비자 조사는 그만하고, 이 건물 옆에 노래방이 있는데 어때요?" 현우가 손으로 노래방 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요!" 민주가 맞장구를 쳤다.

“오케이, 그럼 나갑시다.” 현우가 말하고는 마지막 남은 골뱅이 한 점을 냉큼 집어먹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현우는 마이크를 양손으로 잡고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고, 민주는 탬버린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캔 커피를 홀짝거리며 준태는 노래폴더를 뒤적거리다 리모컨을 집었다. 현우의 노래가 끝나자 느린 발라드곡이 흘러나왔다. 준태가 선택한 곡이었다.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곡이라며 상희는 준태를 바라봤다. 준태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이크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가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저음과 고음을 나들며 그는 곡 소화했다. 오늘 목소리가 잘 나오는 이유는 아마 알코올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노래를 가 눈을 스르르 떴다. 상희가 보였는데, 그녀는 민주의 어깨에 기댄 채 울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우는 것이지? 준태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묘한 성취감마저 들었다. 상희가 일어나 룸을 나갔다. 민주가 선택한 곡이 스피커에서 나왔다. 민주는 한껏 분위기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말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허스키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상희가 도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화장을 고친 듯 얼굴이 보송보송했다. 상희는 준태 옆으로 가 앉았다. 그녀에게서 베이비파우더 비슷한 향기가 났다. 현우는 연스럽게 민주 옆로 자리를 다. 민주가 노래를 마치자 상희는 박수를 세차게 쳤다. 손 아프겠다, 라며 준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상희 역시 그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마주 보고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점액질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민주가 현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현우는 민주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노래방에 둘만 남게 된 것을 확인한 준태는 상희를 안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스웨터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애무했다. 상희는 수동적인 자세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상체를 비틀며 말했다. "우리도 나가자."

"어디로 가지?" 준태가 물었다.

"그건 나가서 결정해." 상희는 말했다.  

룸을 나온 그들이 출입구로 걸어갔다. 컵스 모자를 쓴 종업원이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눈을 번쩍 뜨고 물었다. "어서 오세요. 얼마나 부르실 거죠?"

"저희 계산하려고요." 상희가 말했다.  

종업원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마우스를 빠르게 연속적으로 클릭했다. "한 시간 부르셨으니까 20불입니다."

준태가 지갑을 꺼내려는데 상희가 잽싸게 종업원에게 돈을 건넸다.

"내가 내려고 했는데." 준태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빠가 밥을 사던가. 배고프지 않아?" 상희는 거리로 나오며 말했다.

“오케이.” 준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랗고 환한 보름달이 시커먼 밤하늘에 조명처럼 박혀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날카롭게 스쳤다. 먼저 나갔던 현우와 민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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