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준태는 감자탕을 먹자고 했다. 그녀는 준태의 허리를 감싸며 좋다고 대답했다. 켓지 길에 있는 Open 24 hours 사인이 걸린 한식당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Je t'aime Paris라고 쓰인 연보라 스웨터에 헐렁한 갈색 바지를 입은 아줌마가 두 사람을 맞았다. 얼큰한 감자탕 냄새를 맡자 준태의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들은 솔저 필드 사진이 걸린 벽 쪽 테이블로 가 않았다. 아줌마가 무얼 주문할 거냐고 물었다. 준태는 감자탕 소자로 하나 달라고 말한 후 앞에 앉은 상희를 봤다. 형광등 아래서 보니 상희의 얼굴에 난 주근깨는 그녀를 마치 십 대처럼 보이게 했다. 그가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뭘 그렇게 보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준태는 그냥, 이라고 웃으며 보리차를 마셨다. 은은한 보리향이 나는 따뜻한 차를 마시자 그는 뱃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식당 아줌마가 감자탕 냄비를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상희가 진짜 맛있겠다, 라며 두 손을 모았다. 아줌마가 잠시 기다렸다가 끓으면 먹으라고 한 후 카운터 쪽으로 되돌아갔다. 이내 냄비가 들썩거리자 준태는 국자로 감자탕을 퍼서 상희에게 건넸다. 상희는 술을 더 마실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준태는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라며 카운터 쪽을 봤다. 아줌마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가지고 왔다. 준태는 술잔을 기울이며 내일 수업이 있느냐고 상희에게 물었다. 상희는 아침에 하나 있는 데 별로 중요한 수업은 아니라고 한 뒤 그에게 내일 일하느냐며 되물었다. 준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일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상희는 그렇구나 라며 작게 얘기했다. 감자탕을 먹으며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상희는 소주를 마시면 자기 얼굴이 꼭 김치찌개를 뒤집어쓴 것처럼 된다고 누구한테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준태는 위스콘신대에 다닌다던 그녀의 전 남자친구가 떠올랐다. 상희가 어떻게 알았냐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태는 그녀의 이마에 쓰여 있다고 말했다. 상희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준태는 칠이 벗겨져 허옇게 드러난 탁자 모서리를 쳐다봤다. 그의 침묵이 의외로 길어지자 상희가 뭘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이라고 얼버무렸다. 상희는 그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앞으로 전 남자친구 얘기는 하지 않겠다며 손을 눈가로 올렸다. 준태는 곧바로 기분이 풀렸지만 어깨를 들썩이며 말할 수도 있지,라고 했다. 상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의 이마에 말하지 말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준태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줌마가 계산서와 사과 몇 조각을 가져다주었다. 준태는 포크로 사과를 찍어 상희에게 건넸다. 그녀의 앞니사이에 낀 고춧가루가 보였다. 준태가 앞니에 고춧가루가 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상희는 냅킨으로 치아를 문지른 뒤 이제 없어졌느냐며 그에게 앞니를 보였다. 준태는 바람과, 아니, 냅킨과 함께 사라졌다고 말했다. 상희가 빙긋 웃으며 나가자고 말했다. 준태가 다음은 어디로 가지?라고 묻자 그녀는 이번에도 밖으로 나가면 갈 곳이 생각날 거라고 했다. 준태는 이십 불짜리 지폐 두 장을 테이블에 놓았다. 아줌마가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했다. 매서운 바람이 미시간 호수로부터 불어왔다. 이 도시의 별명이 ‘윈디시티’인 게 괜히 생긴 말이 아니었다. 상희의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치솟았다가 사뿐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로렌스 거리를 걸었다. 그들은 오늘 만났음에도 흡사 오래된 연인과 같은 분위기를 발산했다. ‘종로 Room Salon’을 지나치며 준태는 룸살롱인가 보군, 이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상희가 저곳에 가봤느냐고 물었다. 그는 저런 데 다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상희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앞으로도 저런 곳은 절대로 가지 말라고 강조했다. 준태는 알았다며 룸살롱을 다니고 싶어도 다닐 돈도 없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박용철 종합보험, 시카고 피자, 고려서적을 차례로 통과했다. 몇십 미터 앞에 보이는 Motel Pulaski 네온불빛이 붉게 점멸했다. 모텔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상희의 얼굴도 점점 빨갛게 변해갔다.
준태는 길 건너 멕시칸 식품점을 가리키며 뭐 좀 사가지고 갈까,라고 그녀에게 물었다. 상희는 그렇게 하자며 스프라이트를 마시고 싶다고 대답했다. 준태는 자신도 탄산음료가 당긴다고 말했다. 경광등을 깜빡이며 요란하게 달리는 경찰차 두 대와 앰뷸런스를 지나쳐 보낸 뒤, 그들은 도로를 건너 식품점 안으로 들어갔다. 남루한 차림의 흑인남자가 2리터짜리 콜트 45 맥주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비쩍 마른 그의 몸에서 바싹 마른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잔뜩 꺼낸 다음 그것들을 카운터에 털어놓았다. 데빈 헤스터 저지를 입은 멕시칸주인이 동전을 일일이 센 뒤 일 불이 부족하다며 눈을 부릅떴다.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흑인남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 뒤에 서 있던 준태가 그에게 일 불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당신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이라고 준태에게 말한 뒤 흑인남자는 황급히 가게를 떠났다. 멕시칸주인은 음료수를 비닐봉지에 넣어 준태에게 건넸다. 준태와 상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식품점 간판불이 꺼졌다. 모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오피스로 들어갔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채 안내데스크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준태는 남자의 매부리코에 대고 숙박 요금을 물었다. 남자는 80불이라고 말하면서 상희를 힐끔 쳐다봤다. 모텔 직원으로부터 키를 건네받은 후, 두 사람은 철제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룸에 들어선 준태는 벽스위치를 올렸다. 그는 사 들고 온 음료수를 탁자 위에 놓고 점퍼를 벗었고, 상희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놓았다. 상희가 커튼을 열어젖히자 멀리 서 있는 존 핸콕 센터의 인디고블루빛 첨탑이 보였다. 준태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상희가 몸을 돌렸고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가 준태의 귀를 간지럽혔다. 이윽고 회색스웨터와 셔츠, 브래지어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두 사람은 침대로 이동했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가로등불빛이 준태의 엉덩이 위에 떨어졌다. 허리를 요동치던 준태는 그의 격렬한 몸짓을 받아내던 상희의 몸 위로 쓰러졌다. 밀물처럼 몰려든 극도의 피로감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완전히 덮었다.
미시간 애비뉴를 새까맣게 메운 흑인들이 준태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킬킬거리며 준태에게 과자 부스러기를 던졌다. 그러지 말라고 준태는 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준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의 몸은 극도의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때마침 길에 버려진 몽둥이가 준태의 눈에 들어왔다. 준태는 그것을 집어 들고 흑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준태는 그들 증 맨 앞에 있던 흑인을 몽둥이로 강타했고 흑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로 바닥은 새빨간 핏물로 물들었다. 준태는 쓰러져있는 사람의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뼈가 앙상하고 왜소한 십 대 소녀였다. 준태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피범벅인 채 죽어가는 그녀는 다름 아닌 조이 뷰티 서플라이 단골손님인 크리스털이었다. 준태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곳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준태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술집을 하나 발견했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현란한 사이키델릭 조명이 돌아가는 무대가 정면으로 보였다. 풍만한 몸을 가진 백인여자가 완전 나체로 춤을 추고 있었다. 잠시 후 또 다른 백인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두 여인이 서로 몸을 포갠 채 들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녀들이 그를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준태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준태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끼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여보게, 이 물 좀 마시게나." 쓰레기통 옆에 누워있던 걸인이 준태에게 물병을 건넸다.
왠지 낯이 익다 싶어 자세히 보니 아까 멕시칸가게에서 만났던 그 흑인이었다.
"고맙습니다." 준태는 물병을 받아 들었다. 그는 벌컥거리며 물을 마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것을 토해냈다. 남자가 건넨 건 물이 아니라 신 포도주였다. 준태가 돌아보니 흑인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준태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준태는 애들러 천문대 앞에 와 있었다. 호수 너머로 펼쳐져있는 도시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바람마저도 눈으로 볼 수 있는 투명한 밤이었다. 준태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쳐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호수를 바라봤다. 호수 위에 비친 만월이 아련하게 흔들렸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주위는 여전히 캄캄했고 주적주적 비가 내렸다. 몇 분 전 깨어난 준태는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젯밤 일어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지나쳐갔다. 그는 꿈과 현실, 그 중간쯤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침대로 가 그녀 옆에 누웠다. 준태는 상희의 매끈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으로 미세한 정전기가 일어났다. 그는 그녀가 실제로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가 머리맡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가 몽롱하게 흘러나왔다. 어제 출근하면서 들었던,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던 그 노래였다. 상희가 끄응,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굿모닝." 그녀가 준태의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과 그녀의 앙가슴에 키스를 했다.
"오늘 학교 가기 정말 싫다. 오빠도 그냥 일 가지 않으면 안 돼?" 애교 섞인 말투로 상희가 말했다.
잠시 동안 침묵을 흘려보낸 뒤 그는 대답했다. "그래... 그곳에 가지 않을 거야... 앞으로도 영원히."
그 말에 상희는 잇몸을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오늘 뭐 하지?” 그녀의 목소리와 음악소리와 빗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준태는 대답했다. "시카고 속으로 들어가자."
잿빛무드를 뚫고 그녀는 준태의 얼굴을 응시했다. 천국에서 떨어진 빛이 닿은 듯한 낯설고도 밝은 눈동자. 그의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도 점점 환해져 갔다. 마침내 그 의미를 알았다는 듯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