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조지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자살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일했던 구둣가게 '시카고 금강제화'에서 해고당한 후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였기에 이 선택 외에는 다른 여지가 없었다. 이번 해고로 그가 미국에 온 뒤 일하던 직장에서 잘린 횟수는 정확히 열 차례가 되었다. 빈한한 집에서 자란 조지킴은 경기도에 있는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다음 이런저런 일을 해서 돈을 모은 뒤, 성남 모란시장에 "꽈배기 하나만 잡숴봐"란 상호명의 작은 꽈배기 가게를 오픈했다. 그런데 정말로 가게 이름대로 꽈배기가 하루에 한 개만 팔리는 최악의 판매 부진을 겪다가 불과 일 년이 채 안돼 폐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 보다가 고심 끝에 관광비자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시카고에 와서 조지킴이 첫 번째로 갖게 된 직업은(같은 교회에 다니는 최 씨의 소개로 얻은) 청소일이었다. 조지킴은 일주일에 육일 동안 고된 학교 청소를 수년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다음 스폰서를 구해 어렵사리 그린카드를 취득했다. 영주권을 가지게 되면 그는 훨씬 윤택하고 질 좋은 삶을 미국에서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사십이 되기 전에 미국 시민권을 얻어 아메리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면서 그렇게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도 김종식에서 조지킴으로 스스로 바꾼 후,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조지킴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던 그가 청소일을 그만둔 뒤 직장만 구하면 얼마 안 가 잘리게 되는 경험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된 것이다. 그의 지인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비웃으며 조지킴이 아니라 다시 김종식이라고 불렀다. George Kim(그는 조지 부시 부자를 존경했다.)이라는 영어이름에 자신의 정치성과 정체성을 걸었던 그로서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참하게 무너지는 꼴을 봐야만 했다. 어찌 보면 이번 해고는 조지킴이 스스로 판 무덤이기도 했다. 구둣가게 주인은 조지킴이 근무하는 시간에 전화를 너무 자주 한다며 주의를 수차례나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경고 및 시그널에 둔감한 조지킴은 사장의 경고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던 가랑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지지난 주 어느 날, 조지킴은 코끼리당이 정권을 잡아야 미국이 다시 위대한 나라가 되고, 세계에 모범이 되는 국가가 될 수 있다며 한 시간 가까이 친구인 왕기수와 전화로 노닥거렸다. 서울에 구두를 주문하다가 옆에서 우연히 통화내용을 듣게 된 열성 당나귀 당원인 오너가 폭발했다. "이 새끼 어쩐지 코가 매부리코에 길더라니, 결국엔 코끼리였어?" 사장은 조지킴의 정치색에 극도로 흥분하며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날려 버렸다. 직장을 잃고 채 일주일이 안된 시점에서, 허영으로 가득한 그의 여자친구인 그레이스최도 조지킴을 보기 좋게 차버렸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레이스최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애원하는 조지킴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Listen. 누가 뭐라고 날 매도한다 해도 난 돈이 너무 좋아. 그래, 나는 완전히 돈에 돈 년인가 봐." (몇 년 후 그레이스최는 돈박이라는 시카고 한인 사회에서 유명한 사기꾼을 만나 임신하고 낙태를 하고, 두 번째로 다시 임신을 했을 때, 결국 그를 운명이라 인정하면서 돈박의 신부로서 결혼식장에 눈물을 흘리며 입장하게 된다.) 개 같은 것들. 조지킴은 울분을 삼키며 어금니를 갈았다. 그의 입 안에 든 연두색 캔디가 설익은 사과 맛을 냈다. 그는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며 세상을 등질 D데이를 고려했다. 가만있자,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이번 주말에 자살을 하면... 아니야, 너무 빨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삼십 년 넘게 정들었던 세상인데... 그리고 가더라도 일요일에 중계되는 불스와 닉스 경기는 보고 가야지. 조지킴은 고심을 한 끝에 다음 주 토요일, 미시간 호수로 뛰어들기로 했다. 시카고학파의 걸작인 스펙터클한 다운타운 야경을 배경으로 이루어질 자살은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하얀 비둘기를 튀겨먹은 것처럼 그의 영혼은 한결 평안해졌다. 조지킴은 책꽂이를 뒤적거리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집어 들었다. 작년 겨울 글렌뷰에 있는 고려서점에서 산 뒤 한 번도 건들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동안 사두고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했던 소설책이나 몇 편 읽고 죽자. 책값으로 쓴 돈이 얼마야. 그가 천변풍경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차가운 펩시를 홀짝거렸다. 삼십 여분이 쏜살같이 흘렀고, 조지킴은 책을 덮은 다음 카멜 한 개비를 입술 사이로 걸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싸늘한 11월의 바람이 웬만한 남성의 겨드랑이털보다 숱이 적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쓸어 넘겼다. 올 해로 서른 살이 된 그가 사십대로 보이는 이유는 아무래도 머리숱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조지킴의 이목구비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고 피부도 좋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짙은 남색 하늘을 쳐다봤다. 조지킴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자 도심지의 불빛들이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도시의 하늘을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었다. 윌리스타워와 존 행콕 센터도 자살 장소로 열띤 경합을 벌였지만, 지자요수라고 물을 사랑하는 그였기에 미시간 호수가 최종적으로 선정이 됐다. 조지킴은 매캐한 담배연기를 콧구멍과 입으로 연이어 뿜어댔다. 시간은 돈이야. 시간을 아끼는 것이 곧 돈 버는 일인데 말이지. 며칠 있으면 인생의 마지막 종이 울리는 데, 박태원의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하고 멋지게 떠나야지. 자살은 어찌 보면 가장 잔인한 형태의 살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고귀한 형식의 죽음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조지킴은 중지를 사용해서 담배꽁초를 다운타운을 향해 힘껏 튕겨버렸다.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소파에 앉아 골똘하게 뭔가를 생각했다. 무엇을 하고 죽어야 후회가 남지 않을까. 잔인한 인간에 대해 그만큼 잔인한 복수를 해서 정의를 이루고 죽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야. 우선 조지킴은 이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자신을 이끈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먼저 구둣가게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새끼가 예고도 없이 나를 자르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그것도 내 정치성을 트집 잡아서. 아니, 진보 좌파라는 인간이 틀림이 아닌 다름을 용납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놈의... 혈압이 급격하게 상승하며 조지킴의 얼굴이 붉어졌다. 구둣가게 앞에서 문 닫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보수 우파의 이름으로 그놈의 모가지를 커터칼로 따버린다면. 조지킴의 눈동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몇 초간 침묵 속에서 요란하던 그가 인상을 구기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렇게 되면 그 인간의 면상을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말인데, 그놈 얼굴의 절반을 덮은 그 보라색 반점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게 한반도 지도지, 어떻게 점이야. 한국사람인게 쪽팔리다,라고 틈만 나면 말하는 그런 매국노 새끼한테 무슨 운명의 장난이라고 한반도 모양의 반점이... 아무튼 그 몰골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조지킴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보다는 죽기 전에 원 없이 돈을 써보고 죽는다면 어떨까. 그는 포스터 길에 위치한 은행을 터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엎드려, 이 잡것들아! 돈 깡그리 담아. 넌 뭐야 이년아! 말처럼 생긴 년이 내 말이 말 같지 않는 거야! 머리 숙이란 말이야! 조지킴은 8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권총을 양손에 들고 은행을 단숨에 장악했다. 그런데 조지킴이 엎드려 있는 젊은 백인 여자의 엉덩이를 훑어보는 사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흑인남성이 911을 눌렀다. 오 분이 안 돼서 시카고 경찰이 은행에 들이닥쳤다. 조지킴과 경찰이 인질을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조지킴의 이마에 총을 겨누고 있던 경찰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너, 운동화 끈 풀어졌다. 조지킴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구두로 떨어졌다. 아차차 운동화가 아니었지! 때를 놓칠라 경찰이 수십 발의 총알을 그를 향해 발사했다. 온몸이 갈기갈기 터져나가며 처절하게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지킴은 그만 울고 말았다. 개새끼들, 한두 발도 아니고. 무슨 티라노사우루스를 잡나. 내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야만 자살이지, 저토록 처참하게 경찰의 손에 죽을 수는 없어. 조지킴은 눈 밑에 매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대체 뭘 한단 말인가. 그는 산산조각 난 상념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제거를 했다. 뾰족한 책상 모서리를 손으로 만지던 그의 입가로 음탕한 미소가 흘렀다. 모니카. 모니카는 로렌스 애비뉴 근처에 있는 룸살롱 '종로'에서 일하는 러시안 여자였다. 그녀는 조지킴이 종로를 방문할 때마다 그를 담당했는데, 어디서 배웠던지 한국말을 제법 유창하게 했다. 모니카는 금발에 새하얀 피부, 푸른 눈과 170cm의 키에(조지킴의 키는 168cm였다) 매혹적인 몸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미녀였다. 러시아산 백마를 타고 시카고를 질주하면 정말 짜릿할 거야. 어차피 룸살롱 접대부이니까 돈으로 유혹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종로에서 일하는 여자들 중 2차를 가는 사례도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으니까. 조지킴은 자신의 아파트를 둘러보았고 컴퓨터와 오디오등 전자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그의 캠리도 생각났다. 김종식 형제님. 한국산 차는 절대 사지 마세요. 일제차가 그래도 되팔 때 좋은 값을 받아요. 작년 대림절 기간에 들은 포도나무 한인교회 전도사의 조언대로 일제차를 샀던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이것저것 모두 갖다 팔면 만 불 가까이 나오겠는데. 불과 몇 피트도 안 되는 거리에 돈이 숨어 있었구나. 중고차 가게에 들러 차를 팔고 가전제품은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면 됐다. 조지킴은 빨간 매직팬으로 D데이인 11월 22일에 동그라미를 친 후 침대에 누웠다. 고단했던지 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차이 타운(Chi-Town)의 랜드마크들이 멜랑콜리한 재색 하늘 속으로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조지킴은 애디슨 길에 있는 '서울중고차'에 들렀고, 예상했던 대로 그의 캠리는 흡족할만한 가격으로 딜이 되었다. 그는 구천 불짜리 수표를 들고 은행을 향해 마치 발레리노처럼 경쾌한 스텝으로 걸어갔다. 이천 불은 현찰로 따로 챙겼고, 나머지 칠천 불은 체킹 계좌에 입금했다. 그의 허파는 뜻밖의 거금으로 인해 부풀어 올랐다. 이제야 그의 장엄한 자살 계획이 완료된 느낌이었다. 그는 부푼 허파로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켓지 길에 있는 코리안 바인 J&J로 들어갔다. 지독한 바람 때문인지, 부패한 정치인 때문인지, 걸핏하면 볼을 5야드 뒤로 던지는 베어스 쿼터백 때문인지, 낮임에도 밤에 속한 자들로 술집은 붐볐다. 조지킴은 바 테이블에 앉으며 기네스 엑스트라 스타우트를 주문했다. 바텐더 여인이 그가 주문한 맥주를 잔에 따라서 조지킴의 앞에 놓았다. 그는 수도자의 카푸친처럼 거품을 뒤집어쓴 맥주를 길게 들이켰다. 흑갈색 빛을 띤 맥주의 강렬하고 짜릿한 맛이 그의 혀끝을 자극했다. 누구는 사도신경을 따라 살고 누구는 말초신경을 따라 사는 것도 예정의 일부분일 테지. 단상 한 모금으로 입술을 적신 조지킴의 시상에 맥주 탭을 닦는 바텐더의 얼굴이 거쳤다. 그녀의 눈 밑에 있는 노란 나비. 설마 저런 곳에 문신을, 이라고 조지킴이 웅얼거렸다. 호기심 어린 그의 여린 시선을 여인은 눈치챘다. 여기 처음 오셨나 봐요?,라고 그녀가 말하는 동시에 그녀의 나비가 팔랑거렸다. 이 근처 왔다가 목젖이나 적시고 가려고,라며 그는 대답했다. 목적을 적시러 들렀다고요? 꽤 시적인 표현인데요,라고 그녀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목적이 아니라 목젖을 적신다고요,라고 조지킴이 정정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킥킥 웃었다. 그녀는 재즈 댄스를 전공하고 있는 데, 시카고에 온 지는 277일이 되었고, 바에서 일한 지는 95일이 됐다고 했다. 시카고는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에요,라고 여인은 짧은 웨이브 머리를 넘기며 덧붙였다. 여기 가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 그런지 순진한 소리를 하네요, 좀 더 살아봐요, 이 도시는 그야말로 개가 토해낸 게토란 것을 알게 될 테니,라며 조지킴은 그녀의 청정한 숨결에 콧방귀를 뒤섞었다. 여인은 뽀드득 소리 나게 칵테일 잔을 닦았고, 조지킴은 반쯤 남은 수도자의 영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십 불 짜리 지폐를 바에 놓은 뒤 빛의 입자들이 충돌하는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정수리 위로 노란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시카고는 위대한 도시예요! 꿈이 있다면 말이에요! 나비는 나긋하지만 단호하게 그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