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와 상아를 만나고 집에 들어온 해리는 햄&치즈 샌드위치를 밀러 라이트와 함께 먹었다. 그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보다가 한국 걸그룹 중 한 명이 음주 운전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녀가 속한 연예 기획사 대표는 아티스트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그리고 앞으로 더욱 철저히 아티스트를 관리해서 이런 일이 결코 두 번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음주운전도 그렇지만 해리는 아이돌 그룹 멤버를 두고 아티스트, 즉 예술가란 단어를 기획사 대표가 사용한 것에 대해 왠지 모르게 의아함이 들었다. 아티스트라... 이건 뭐 아무나 다 예술가가 되었구나. 해리는 아이돌 그룹을 과연 아티스트라고 지칭하는 게 맞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또한 누가 그렇다면 진정한 아티스트이고, 예술의 정의는 과연 무엇이며,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존재하는지, 인간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면, 우연히 던져진 존재를 통해서 궁극적인 목적이 도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사색했다. 그러다가 해리는 다음과 같은 단상을 그의 SNS에 쓰게 되었다. "샤워하셨어요? 아티스트입니다"
무대에서 그렇게 허리를 돌리는 사람이 아티스트라면, 무대에서 저렇게 접시를 돌리는 사람도 아티스트라 할 수 있다. 접시 돌리는 사람이 아티스트라면 접시를 닦는 사람 역시 아티스트라 할 수 있다. 접시를 닦는 이가 아티스트라면 몸을 닦는 세신사도 아티스트라 할 수 있다. 타인의 몸을 닦는 이가 아티스트라면 자기 몸을 닦는 사람 역시 아티스트라 할 수 있다. 즉 샤워만 해도 아티스트인 것이다. 해리는 자신이 쓴 글을 한 번 더 읽은 뒤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며칠 후 해리는 배 원장과 상의할 일이 있어 오전에 시카고 데일리를 찾았다. 신문사 주차장은 차로 가득 차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독일제 차들이 많았다. BMW, 아우디, 폭스바겐 등등. 해리는 커다란 쓰레기 덤스터 옆 작은 공간에 그의 엘란트라를 주차했다. 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재킷 속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일층에 위치한 신문사 편집국은 직원들로 분주했다. 해리는 문화센터 사무실이 위치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오늘 배 원장을 만나 리허설 장소로 문화센터 공간을 사용해도 괜찮을지 부탁하려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배 원장은 그녀의 자리에 없었다. 문화센터 벽에는 동양화가 한 점 걸려 있었는데, 커다란 백호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오는 그림이었다. 해리가 복도 끝으로 걸어가 거기에 있는 주황색 소파에 앉았다. 벽시계를 보니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십 분이 남아있었다. 문화센터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시카고 기원' 간판이 그의 눈에 띄었다. 해리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기원 문을 열었다. 머리가 새하얀 노인들 몇몇이 안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녹색 홈버그 모자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노인이 해리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는지?” 노인이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그냥 어떤 곳인가 궁금했어요. 바둑을 두는 곳이군요." 해리가 엉거주춤하게 서서 대답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와서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는 그런 곳이에요. 어떻게 바둑이나 한 번 배워 보실래요? 우리도 젊은 사람이 멤버로 있으면 좋지." 노인이 종이컵에 보리차를 따라 해리에게 건넸다. "제가 한 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해리가 공손하게 말한 다음 보리차를 마셨다.
"언제든지 생각나면 찾아와요. 오전 열 시부터 다섯 시까지 문을 열고, 돈도 얼마 들지 않으니까." 빙그레 웃는 노인의 얼굴에 시냇물처럼 주름이 번졌다. 해리가 허리를 깊이 숙여 그에게 인사하고 기원을 나오니 어느새 배 원장이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었다. "어머, 왜 거기서 나와?" 배 원장이 놀란 듯 해리에게 말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어떤 곳인지 잠깐 봤어요.” 해리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극 준비는 잘 되어가요?" 그녀가 말하며 머그 컵에 꽂혀있는 볼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원장님 덕분에요. 배역 캐스팅도 마무리됐고 곧 연습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리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제 리허설을 시작하는데요?" 배 원장이 수첩에다가 무언가를 쓰며 물었다.
"리허설이요? 이번 주말부터 모여서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실은 제가 오늘 원장님을 찾아온 이유가..."
해리가 말을 하다가 그 끝을 흐렸다. 배 원장이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공연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곳에서 공연할 테니까 리허설 장소로 여기보다 적합한 곳이 없겠지요." 백 원장은 해리가 방문한 목적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리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토요일 하고 일요일에 리허설을 하면 어때요? 시간은 오전 열 시에서 오후 다섯 사이에 하면 될 것 같아요 " 그녀가 수첩에 토요일, 일요일이라고 쓰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해리가 넙죽 목례를 하며 말했다.
“문화센터 스태프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세요.” 배 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해리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번 더 한 다음 그곳을 나왔다. 해리는 이제 훈을 만나기 위해 훈이 사는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훈은 하늘색 스트라이프 남방과 올리브색 면바지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은 차림이었고, 머리는 왁스를 발라 한껏 치켜세운 스타일을 한 채 아파트를 나왔다. 주차장에서 훈을 발견한 해리가 경적을 울렸다. 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훈이 조수석에 오르며 말했다."잘 지내셨습니까?" "아주 잘 지냈다. 근데 너 오늘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지 신경을 썼는데." 해리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첫 리허설인데 신경 써서 입어야죠." 훈이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 "네 역할이 세탁소에다 바지 맡기는 손님이 아니라, 세탁소에서 바지 다리는 역인 건 알고 있지?" 해리는 역할을 언급했고, 훈은 그 말에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포복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