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로 해리의 엘란트라가 보였다. 해리는 차를 몰고 브린마 길에 있는 커피 타임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듀크 알링턴의 "Take the A Train"의 경쾌한 멜로디가 차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인터 스테이트 90은 예상보다 교통 체증이 심하진 않았다. 그는 로렌스 엑시트에서 완만하게 우회전해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갔다. 그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코리안 저널 건물이 왼쪽으로 보였고, 해리는 더욱 속력을 내어 빨간색 신호등으로 바뀌기 직전의 노란색 신호등을 통과했다. 그는 맥도널드와 로렌스 안경점을 지나 켓지 로드에 다다랐다.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자 커피타임 앞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막 떠나는 것이 보였다. 주차 공간을 지체 없이 확보했다는 사실에 해리는 신이 났다. 그는 그 자리에 차를 세운 다음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의 커피숍 벽에는 작은 사이즈의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은은한 미라빌리스 향이 실내에서 났다. 쇼트커트를 한 이십 대 여자 종업원이 구석 테이블에서 김밥을 먹다가 해리를 들어온 것을 보고 커피 바 뒤로 돌아 들어갔다. 여자는 해리가 어디서 만난 듯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커피 바 뒤로 걸린 메뉴 보드를 보다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그녀는 커피를 제조하기 시작했고 해리는 그녀를 어디에서 만났는지 계속 생각을 하며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안을 둘러보니 구석에 있는 매거진 스탠드가 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잡지나 읽어볼까. 해리가 일어나 잡지 진열대로 걸어갔다. 요란하게 커피 가는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그는 애런 로저스가 표지모델로 나온 SI 매거진을 집어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 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종업원이 그가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그 순간 해리는 여자가 장충동 족발집에서 일하는 여자란 걸 기억해 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도 뵙네요."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해리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혹시 누구시죠? 저를 아시나요?" "장충동 족발집에서도 일하지 않으세요? 거기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해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시구나, 그곳에서 절 보셨군요,라고 대답했다. 이따가 저녁 때는 장충동 가서 또 일해요,라고 그녀가 킥킥 웃으며 얘기한 후, 뭐라고 말을 더 하려고 하는 데 출입문에 달린 벨이 소리를 냈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이 출입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해리에게 목례를 하고서는 카운터 자리로 되돌아갔다. 상아와 연지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해리는 탁자 가운데 있던 커피 잔을 자기 쪽으로 옮기며 그들을 반겼다. 165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웨이브 머리를 한 연지는 연한 핑크색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아름답기보다는 귀여운 쪽에 가까운 외모였다.
"잘 지내셨어요?" 파란색 컵스 모자를 푹 눌러쓴 상아가 해리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상아야 반갑다. 나야 뭐 잘 지내지." 해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연지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 친구가 얘기했던 연지예요. 서로 인사하세요." 상아가 말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상당히 재능 있는 분이라고 상아가 칭찬이 대단하던데요." 연지는 상아와 해리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재능은 무슨, 상아가 원래 오버를 많이 하잖아요."
쑥스러운 듯 해리가 커피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버 아닌데... 오빠 정말로 재능 있어요." 그렇게 말한 다음 상아는 일어섰다. 그녀는 연지에게 무엇을 마실 거냐고 물었고 연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해리가 잽싸게 상아에게 카드를 주었고, 상아는 웃으며 잘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상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얼그레이 티를 주문하고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슬쩍 본 뒤 그들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신용카드를 도로 해리에게 건넸다.
"연지 씨는 언제 시카고에 왔어요?" 해리가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물었다.
"삼 년 전에 왔어요. 원래는 LA로 유학을 가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영화 전공은 LA가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LA는 절대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외삼촌이 사는 시카고로 오게 됐죠. 여기서 뷰티 서플라이를 하고 계시거든요." 연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리는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영화를 전공하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어요. 미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일본 영화, 다양하게 다 좋아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공까지 하게 된 것 같아요." 연지는 대답했다.
해리가 기침을 한 뒤 물었다. "부모님이 영화 전공한다니까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처음에는 아빠가 특히 반대가 심했는데, 제가 이거 안 하면 불행할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결국엔 허락을 하시더라고요." 연지가 잇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가 예쁘다고 해리는 순간 생각했다. 종업원이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얼그레이 차를 가지고 왔다.
"커피 리필해 드릴까요?" 그녀가 웃으며 해리에게 물었다.
해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들이킨 뒤 해리에게 물었다. "연출님은 그럼 연극을 전공하신 거예요?" "전공은 영문학을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연극을 하게 되었어요." 해리가 대답했다. 상아가 얼그레이 티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그에게 물었다. "그렇잖아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오빠는 희곡 쓸 때 어디서 소재에 대한 영감을 얻어요? 왜냐하면 나도 시나리오를 쓸 때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나가 가장 어렵거든요." 해리는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내가 경험한 일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 아니면 경험은 못했어도 잘 알고 있는 어떤 분야가 있으면, 그것 또한 희곡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 같아.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을 쓴다는 것이야. 상상력이란 것도 실재에 기반을 두었을 때 더 힘을 발휘하는 것 같거든." 해리는 종업원이 리필해 준 커피를 마시고 연지와 상아에게 다시 물었다. "두 사람은 그럼 영화를 통해 이루고 싶은 어떤 것이 있어요?" 그의 질문을 들은 그녀들은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솔직히 영화를 전공하는 것이 제 꿈이었기에... 지금 현재로서는 영화에 대해 배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지는 영화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지, 영화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요. " 연지가 쌍꺼풀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렇군요. 그럴 수 있어요. 영화 전공 하기까지 연지 씨만의 어떤 고충이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수단과 목적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니까 졸업한 뒤에도 한 편의 영화를 수단으로 다음 영화를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해리가 말한 다음 콧잔등에 걸쳐진 안경을 고쳐 썼다. "저 같은 경우는 오빠한테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사람의 일상 자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를 좋아해서 다큐멘터리 감독이나 PD가 되는 게 일차 목표예요. 그리고 가능하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인 미혼모나 노숙자들의 모습을 그리는 게 다음 목표이기도 해요. 예전에 TV에서 노숙자를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감명 깊었거든요. 그런데 뭐 나중에 바뀔 수도 있고요." 상아가 따뜻한 머그잔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얘기했다. "상아는 나랑 뭔가 흡사한 목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 나 역시 연극을 통해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게 꿈이거든. 그들의 삶을 날카롭고도 풍자적으로 그리는 것이지." 해리가 말했다.
"그다음은요?" 연지가 그에게 물었다.
"내 연극을 본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이든, 아니면 타인의 삶이든, 그것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란 마음을 갖게 된다면, 난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아요. 물론 예술이 종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맛집에 가서 줄 서서 먹는 무슨 음식처럼 예술이 소비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리가 커피를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예술을 통한 어떤 성찰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떤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것. 여기에는 예술가도 포함되는 거예요. 난 거기에 진정한 예술의 존재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예술이 다 똑같은 목적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하는 연극은 그런 기능을 하길 바라는 것이지요." 해리의 말을 들은 연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구석 테이블에 앉아 이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던 쇼트커트의 얼굴이 조금은 침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