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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Jang Nov 18. 2024

낮술이 예술보다 나은 이유 (1/3)

1.

구름이 낮게 낀 멜랑콜리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오후였다. 세 명의 남자가 글렌뷰에 있는 족발집에 앉아 낮술을 마시대화를 하고 있다. 남자로선 조금 긴 헤어스타일에 안경을  해리는 30대 중반의 극작가였다.(그는 시카고 교민 신문사인 코리안 저널에서 파트타임 기자로도 일했다) 그의 건너편에 앉은 두 남자는 이십 대 후반의 기윤과 훈이었다. Sox라고 새겨진 검은색 화이트삭스 모자 쓴 기윤은 고둥학교 때 부모를 따라 시카고로 이민을 왔다. 얇은 남색 아디다스 후드 집업을 입은 훈은 군대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와 작년 영주권을 취득한 상태였다. 해리가 훈이 들고 있는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쇼트커트에 주름치마를 입은 웨이트리스가 김치찌개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매운 향이 테이블 위로 진득한 잉크처럼 확 퍼졌다. 오인분처럼 보이는 삼인분 찌개의 양을 보고 눈이 황소처럼 커진 기윤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해리는 이 집은 족발집이지만 김치찌개와 막국수가 기가 막히다고 말했다. 기윤은 양이 진짜 엄청나다고 한 다음 국자로 김치찌개를 퍼 사발에 담아 해리와 훈에게 건넸다. 냄비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김이 해리의 안경에 달라붙었다. 해리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안경 닦는 헝겊을 꺼내 렌즈에 서린 김을 제거했다. 그가 안경을 쓰고 보니 사발에 담긴 김치찌개가 더욱 새빨갛게 보였다. 기윤이 술잔을 반쯤 비운 후 희곡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해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해리는 거의 다 마무리되어 간다며 조만간에 배우를 구해 리허설을 시작할 거라고 말한 후, 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잔을 막 비운 훈이 희곡 내용에 대해 물었고, 해리는 제목은 샴버그 드라이 클리너인데 세탁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연극아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훈이 세탁소 이야기군요? 제목이 독특한 게 좋은데요, 지난번 작품은 가발 가게가 배경이었잖아요, 라며 킥킥대고 웃었다. 기윤이 김치찌개를 다시 국자로 퍼 사발에 담으며 공연은 어디서 할 거냐고 물었다. 해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시카고 데일리 건물 이 층에 작은 공간이 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공연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는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올 거라고 예상은 안 한다고 덧붙였다. 배우는 어디서 구하는 거냐고 기윤이 물은 다음 목을 좌우로 돌리자 그의 목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해리는 그가 다니는 한인 교회에 드라마 팀이 있는데, 거기에 괜찮은 애들이 꽤 있다고 말하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윤이 공연 날짜가 잡히면 알려달라고 꼭 보고 싶다고 말한 뒤 도토리묵을 집어먹었다. 당연하지,라고 해리는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출렁거리는 술잔 속으로 웨이트리스가 걸어왔다. 그녀가 해물파전을 들고 와 이건 서비스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이래서 내가 여기만 온다니까,라고 말하며 훈이 해물파전 한 피스를 접시에 담아 해리 앞에 놓았다. 그러자 해리는 훈에게 너는 형들한테서 사랑을 많이 받겠다,라고 말했다. 해리는 이어서 같은 식당에서 일하는 기윤과 훈에게(그들은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요새 식당일은 어떠냐고 묻고는 파전을 간장에 찍어 날름 입속에 집어넣었다. 평일은 좀 그래도, 주말엔 못해도 백 불은 버니까 그런대로 괜찮아요,라고 기윤이 파전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하루에 백 불이면 생각보다 꽤 괜찮네,라고 해리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서빙 일이 아니라 진짜 직장을 잡아야 하는 데... 기윤의 목소리가 나오다 말고 혀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해리는 진짜 직장? 너희들이 지금 하는 일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 일이냐며 너무 돈이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현재에 충실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기윤과 훈이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리는 그들에게 궁극적인 어떤 목표가 있냐고 말한 후 보리차가 든 컵을 집었다. 기윤은 어떤 구체적인 삶의 목표는 없고, 그냥 시간 나면 시카고를 벗어나 여행을 자주 하는 게 꿈이라며 그래서 주식에 관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투자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기윤이 손을 들자 주방 앞에서 아줌마와 잡담을 나누던 웨이트리스가 그들 자리로 걸어왔다. 기윤이 입가심으로 맥주나 한 잔씩 하자며 쿠어스 라이트 세 병을 주문했다. 훈이 돌아가는 웨이트리스의 매끈한 다리를 슬쩍 본 후 입을 열었다. 저도 뭐 월급도 모으고 주식으로 돈도 좀 벌어서, 저도 주식하거든요, 작은 리테일 스토어를 오픈하고 싶어요, 식당은 일해보니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그나마 뷰티 서플라이가 가장  무난한 것 같아요, 그리고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행복하게 사는 게 제 꿈이에요, 그냥 평범하죠,라고 말하며 빙긋 웃었다.

웨이트리스가 쿠어스 세 병을 테이블에 놓고 빈 그릇들을 치워갔다. 해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한 다음 훈에게 말했다. 평범한 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게 가장 이루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제대로 된 배우자를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암튼 또 얘기하지만 돈보단 행복을 추구해라,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야, 너희 둘 다 주식을 한다니 하는 말인데, 주식에 너무 기대를 걸지 마,라고 한 후 그는 물통을 탁자 한쪽으로 치웠다. 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술마신 뒤, 해리 그에게 했던 같은 질문을 해리에게 던졌다. 해리는 몇 초 동안 생각해 보다가 시카고 교민의 모습을 솔직하게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연극이 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거울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모양새를 고치고 수정하듯이 자신의 연극이 그런 역할을 감당했으면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때때로 연극이 과연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실은 자기에 불과한데 과도하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타인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술을 하는 당사자 한 테만큼은 그것이 도피처이든 안식처이든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하다고 해리는 보태어 말했다. 기윤은 묵묵히 그 말을 들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고, 훈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아파트 렌트비는 한 달에 얼마씩 내냐고 해리가 기윤에게 물었다.

그러자 기윤은 훈과 서로 사백 불씩, 총 팔백 불을 월세로 낸다고 화장실에 누가 있지 화장실 앞에 서 있는 훈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해리는 그 정도면 시카고에서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들어선 훈이 소변기 앞에 서서 바지 지퍼를 내리며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어린아이의 소변 같은 연약한 빗줄기 주르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음 날은 계절의 여왕 5월에 속한 하루답게 화창한 날씨였다. 최근엔 비가 오고 흐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오래간만에 쾌청한 날이었다. 보도블록 옆에 심긴 꽃과 그 향기에 둘러싸인 스타벅스 데스플레인 점에 해리가 앉아있었다. 그는 카모마일 티를 홀짝거리며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배원장님. 감사합니다." 그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배원장은 시카고 데일리 문화센터의 담당자였다. 그녀는 한국의 유명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는데, 해리의 예술관을 지지하며 물심양면으로 를 도왔다. 장소 임대료는 이번에도 무료였다. 다만 무대 설치나 조명 장비 드비용은 해리가 부담해야 했다. 그가 배원장과의 통화룰 마친 후 휴대폰을 들고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해리가 상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와 상아는 로렌스 한인 장로교회에서 만난 사이였는데, 교회 드라마 팀에 속한 상아는 콜롬비아 리지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상아야, 장소는 잘 해결되었다. 이번에도 배원장님이 도와주셨어. 그나저나 어떻게 알아봤니?" 해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잘됐요. 아 네, 오빠가 좋아하실만한 괜찮은 친구 학교에 있어요. 연지라고 하는데, 희곡 줄거리를 말해주니까 굉장히 좋아하던데요." 상아는 활기차게 말했다.

"잘됐다. 그런그 찬구한테 얘기했지? 이번에 출연료는 줄 수 없다고...” 해리가 얘기를 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오빠도 별 걸 다 걱정하시네요. 밥이나 잘 사주세요." 상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당연하지. 그럼 네 명의 등장인물 중에 세 명이 정해졌고, 이제 한 명만 더 구하면 캐스팅 완료." 해리가 뺨을 긁었다.

해리는 연기도 했는데 이번 연극에서는 그가 세탁소 주인 역할이었다. 상아는 그의 아내, 연지는 해리와 바람을 피우는 아르바이트생 역할이었다. 이제 바지 다림질하는 남자 배역만 구하면 됐다.

"연지라는 친구하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던 해리가 일어나며 물었다.

"내일까지 학교 수업이 있으니까 힘들고, 모레 토요일이 어떨까요?" 아가 그에게 되물었다.

"토요일, 나는 좋아." 해리 답하며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다.

"제가 금요일 저녁에 전화할 테니 그때 시간하고 약속장소를 정해요." 상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여러모로 고맙다." 통화를 마친 해리의 입가 상현달 같미소가 걸렸다.

자리마자 해리는 노트북을 켰다. 예일 레퍼토리 극장 사진이 모니터 배경 화면으로 떴다. 연극이야 말로 인간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가장 원시적이면서 가장 날 것 같은 예술이. 한국 사람들이 시카고에서 세탁소를 많이 하니까 분명히 뭔가 통하는 게 있을 거야. 해리가 내적 독백을 하며 이메일을 확인했다. 서른 개가 넘는 새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는 몇 개의 메일을 확인해 보다가 한국 포털 사이트로 들어갔다. 한국 유명 연예인의 자살 소식 헤드라인으로 떴다. 해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가 한때 굉장히 좋아했고 연기력이 출중하다고 생각했던 여배우였다. 그녀를 둘러싼 온갖 악성 루머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었다. 해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기사창을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토록 젊은 나이에 자살 필요는 없었는데. 하기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그는 고개를 들고 스타벅스 밖을 내다보았다. 느덧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적당한 도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과 꽃들이 살랑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비가시적인 바람이 가시적인 되는 순간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그처럼 사유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 어렴풋한 미소를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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