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이 서울로 돌아간 지도 보름이나 지났다. 준식은 고된 하루하루를 가뜩이나 요란한 사람들과 소란스럽게 지내다 보니 그녀를 잃은 상실감으로부터 비교적 어렵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상실과 슬픔의 반대말은 획득과 기쁨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소란과 요란이었구나,라고 준식은 생각했다.
“박준식 어쩌냐, 이제 사기 칠 대상이 사라져서. 너도 이제 싱글이 되어서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솔직히 하나 고백하자면 나도 너랑 같은 상태가 되게 해달라고 교회 갈 때마다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가 여자친구를 갖게 되는 게 아니라, 네 여자친구가 떠나게 될 줄이야.” 용칠이 마루짱 컵 라면을 나무젓가락으로 집으며 킬킬거렸다. "어쩐지 교회에 앉아있을 때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더니만. 매번 예배 도중에 자빠져 자서 잠꼬대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니. 저런 괘씸한 놈." 준식이 툴툴거리며 일어나 키친에서 수돗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일을 마치고 귀가한 그들은(오늘은 르블론 헤어, JD 트레이딩 그리고 로레알 회사에서 배달된 제품들을 진열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썼다) WGN을 시청하고 있었다. 시카고 컵스와 LA 다저스의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컵스가 정말로 우승을 하고 싶다면 양키스처럼 돈을 팍팍 써야 해,라며 준식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운드에 서 있는 다저스의 구원 투수가 컵스의 4번 타자를 노려봤다. 9회 말 투아웃, 주자는 2루와 3루. 스코어는 LA 3, 시카고 2. 이제 안타 하나면 경기를 뒤집고 역전승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세트 포지션에서 투수가 용틀임을 하더니 불같은 강속구를 뿌렸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바깥쪽에 꽉 차는 101마일 직구였다. 4번 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낸 후 다음 타자를 상대할 수도 있었지만 투수는 정면 승부를 걸어온 것이다. 리글리 구장의 모든 컵스 팬들이 일제히 일어나 발을 굴렸다. 투수가 장발을 휘날리며 2구째를 던졌다. 슬라이더가 날카롭게 휘며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 걸쳤다. 스트라이크 투. 텔레비전을 보는 용칠이 초조한 얼굴로 라면을 오물거렸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난 후, 투수는 힘차게 공을 뿌렸다. 홈플레이트를 튕기는 폭투성 볼이었다. 하지만 컵스 타자의 방망이가 어이없게 돌아갔다. 삼구 삼진이었다. 컵스는 이로써 5연패를 당하며 디비전 최하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공 세 개로 저 좋은 찬스를... 저 자식 당장 트레이드 시켜야 돼. 연봉만 수백억 받아쳐먹고. 나는 진짜 일억만이라도 수중에 있어봤으면 좋겠다.” 열받은 용칠이 식료품이나 사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구가 자동차 키를 집더니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이 집 근처에 있는 도미닉스에 들어섰다. 평일이었지만 매장은 음식재료, 생필품 등을 사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탄력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히스패닉 여자가 용칠의 시야에 들어왔다. 애처롭게 그녀를 바라보는 용칠의 눈에서 초록빛 레이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상구가 용칠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무슨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아주 그냥 눈에서 광선이 나오네, 광선이. 뭘 그렇게 정성스럽게 쳐다봐!” 그러자 용칠은 자신의 유일한 취미에 제동을 거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생각해 보라며 되레 상구에게 핀잔을 주었다. 용칠이 매장이 있는 초대형 냉장고에서 그들이 항상 마시는 버드와이저 식스팩 두 묶음을 꺼냈다. 상구가 월급도 탔으니 다른 맥주를 마셔보자며 그가 들고 있던 맥주를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상구는 대신에 기네스 드라우트 한 박스를 꺼냈다. 그들은 저염 베이컨과 커다란 햄 두 덩어리, 달걀 한 판과 저지방 우유, 닥터 페퍼, 초콜릿 쿠키 등을 카트에 가득 담은 뒤 그것을 끌고 캐시 레지스터 앞에 섰다. 방금 전 용칠이 주목했던 여인이 바디워시와 샴푸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용칠이 바디워시와 여인을 번갈아보았다. 여자친구도 한 명 없이 이러고 사느니 차라리 저 여자의 몸 구석구석으로 거품이 되어 소멸해 갈 수만 있다면. 용칠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여인이 구매한 도브 제품을 바라보았다. 세뇨리타는 용칠을 쳐다보고는 피식 웃으며 체크아웃 카운터를 빠져나갔다.
“Is that all?” 매장 점원이 용칠에게 말했다.
“댓짓.” 딴짓하다 말고 용칠이 캐시어에게 재빨리 말했다.
집에 돌아온 뒤 용칠은 도미닉스에서 사 온 식료품들을 몽땅 냉장고에 넣은 뒤 흑맥주를 꺼냈다. 준식은 자기는 흑맥주를 마시면 희한하게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는 희한한 소리를 했다. 상구가 잭링크스 육포를 꺼내 가지고 왔다. 준식이 베란다 문을 열자 시원한 질소와 산소의 입자들이 거실로 스며들었다. 세 사람이 흑맥주를 잔에 따라 육포와 더불어 먹으며 한담을 나눴다. 밤의 그림자가 그들이 들고 있는 맥주잔 속으로 싱커성 볼처럼 떨어졌다.
오색찬란한 빛의 산란을 뿌리며 이른 시각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정오가 지나자 도시는 익숙한 재색으로 변화했고, 오후 다섯 시가 되니 호수는 강한 비로 인해 격렬하게 요동쳤다. 정 사장은 오전 내내 골프채를 손에 들고 초조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오후가 되자 골프는 포기하고 문어발 청소 용역 고사장과 곱창에 낮술이나 마셔야겠다고 말하며 먼저 퇴근을 했다. 날씨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피 엔터프라이즈를 찾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카운터에는 얼마 전 새로 고용된 흑인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주위를 살피면서 동시에 작은 손거울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자신의 치아 상태를 확인했다. 용칠과 준식은 매장 안에서 가발을 정리했고, 상구는 창고에서 말리 브레이드 박스를 잘 나가는 색깔 별로 분류를 했다. 미시즈 히긴스가 살아있을 때 앉아서 점심을 먹던 작은 나무상자가 보였다. 삐쩍 마른 몸을 쭈그리고 나무상자 위에 앉아서 싸 온 도시락을 먹던 그녀가 상구는 문득 보고 싶어졌다. "아줌마,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평안히 잘 지내시죠?" 상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그에게 미시즈 히긴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나는 너무 좋은 곳에 있어. 그러고 보니 상구 너한테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떠났네. 그곳에서 일할 때 나한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 "제가 뭘요...” 상구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상구야,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 잘 들어.” 미시즈 히긴스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런데 무슨 말인데요?” 상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어서 그 도시를 탈출해. 너는 하루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해. 그리고 너를 애타게 기다리는 곳으로, 널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야 해. 이 얘기를 너한테 꼭 해주고 싶었어.” 그녀가 말했다. “여기를 떠나면 전 갈 곳이 없어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상구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네가 태어나고 자란 그곳으로... 돌아가...” 그녀의 실재인 듯 아닌 듯한 목소리는 사그라들더니 이내 그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후드득 멧비둘기 떼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강한 폭우가 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세차게 강타했다. 상구는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빗소리와 분간하기 힘든 오줌 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다리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상구는 담배를 하나 물고 창고 뒷문을 열었다. 빗물이 그의 이마와 눈썹과 속눈썹을 동시에 적셨다. 그는 담배 연기를 콧구멍으로 내쉬었다. 그가 서울에 살았을 때 자주 가던 마포구의 재래시장과 시장 안에 있던 오래된 순댓국집이 불현듯 생각났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그가 자주 갔던 곳이었다. 상구는 기억의 문을 열고 눈앞에 펼쳐진 다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마에 주름살이 많던 순댓국집 할머니. 그가 갈 때마다 베트남으로 간 손자를 닮았다며 순대를 많이 넣어 주었던 할머니. 그 할머니는 더 이상 식당에서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사십 대 부부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상구가 살았던 다세대 삼층집은 그대로였고, 건물 일층에 있던 동성 비디오는 맵시나 미용실로 바뀌었다. 앞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인상 좋게 생긴 아줌마가 그를 맞았다.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그녀가 커트보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냥 짧게 깎아주세요.” 상구가 미용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줌마가 능숙하게 가위질을 시작했고, 잘려나간 그의 머리카락이 미용실 바닥에 수북이 쌓여나갔다. 상구는 정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깊숙이 응시했다. 그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던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