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리와 훈은 연지와 상아를 만나기로 한 장충동 족발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리허설을 하기 전, 연극에 출연하는 사람들끼리 인사도 하고 친목도 나누는 겸해서 해리가 주도해서 만든 자리였다. 식당에 먼저 도착한 해리와 훈이 창가 쪽에 위치한 빈자리 하나를 맡고는 그곳에 엉덩이를 내렸다. 대낮이었음에도 족발집은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지난번 왔을 때 해리가 봤던, 커피타임에서도 만났던 쇼트커트는 보이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묶은 웨이트리스가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웨이트리스(미소를 지으며): 몇 명이시죠?
해리(그녀를 올려다보며): 두 명이 더 올 거예요.
웨이트리스: 준비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해리: 네 알겠습니다.
십여 분이 지나자 상아가 족발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아(웃으며): 좀 늦었지요? (해리의 옆에 앉으며) 차가 많이 막혀서...
상아는 훈의 얼굴을 힐끔 보았고, 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해리(의아한 듯): 교통 체증이 있었구나, 아마도 컵스하고 양키스 경기가 있어서 그럴 거야, 그나저나 연지는?
상아: 밖에서 잠깐 통화를 하고 들어온대요.
해리는 상아의 말에 그렇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연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연지는 옅은 라임색 파스텔 톤 카디건에 머리에는 흰색 헤어핀을 꽂고 있었다. 연지를 본 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고, 그녀를 본 훈의 얼굴에도 덩달아 밝은 빛이 감돌았다.
연지(해리의 맞은편에 앉으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해리(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리며): 난 잘 지냈어, 너도 잘 지냈지?
연지: 저도 잘 지냈어요. (사이를 두었다가 빙긋 웃으며) 그런데 이번에 연극하기로 결정하고선 가슴이 진짜로 뛰는 거예요. 감사해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해리: 감사하기는 내가 오히려 고맙지.
상아(둘 사이에 끼어들며): 뭐야 두 사람, 무슨 몇 달 동안 서로 못 본 것처럼, 며칠 전에 봤으면서.
해리: 아, 그리고 정식으로 인사해. (훈을 가리키며) 이쪽은 훈이라고 이번에 연극 같이 하기로 했어.
훈(연지와 상아를 번갈아 보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두 분 다 영화 전공하신다고 들었어요. (웃으며) 전 영화 보는 게 취미입니다. 연극은 예전에 교화에서 한 번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맡았던 역할은 직립보행하는 당나귀였습니다.
상아가 그 말에 깔깔거리며 만나서 반가워요, 이번 연극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해요,라고 말했다. 연지도 그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해리가 희곡 세 부를 가방에서 꺼낸 다음 세 사람에게 건네면서 리허설 전에 읽어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오늘은 함께 식사하면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훈: 이제 주문을 할까요?
해리: 오늘은 내가 사는 것이니까 그렇게 알고 먹어. (사이) 족발하고 찌개에 간단하게 소주나 한 잔씩 하자. (상아를 보고) 오늘 내가 대리비도 줄 테니까 운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연지(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그렇게 하자 상아야. 낮술을 즐기면서 예술에 대해 토론하면 즐거울 것 같아.
상아는 못 이기는 척하며 그럼 그렇게 하자며 피식 웃었다. 그들은 메뉴를 정했고 해리가 손을 들자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해리: 일단 족발 대자 하나 하고요, 김치찌개 이인 분, 그리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종업원: 네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자리는 그들이 주문한 음식과 술로 채워졌다. 네 사람이 동시에 소주잔을 들었다. 우리의 연극을 위하여 건배,라고 해리가 말하자 세 사람도 그를 따라 우리의 연극을 위하여,라고 말한 다음 술을 다 같이 들이켰다. 상아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김치찌개를 국자로 퍼 사람들 앞에 놓았다. 훈이 그녀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하자 상아는 웃으며 유어 웰컴, 이라고 말했다.
연지(젓가락을 들며): 그런데 오빠는 이번 희곡은 어떻게 쓰시게 된 거예요? 지난번에 희곡 소재를 얘기할 때 직접 경험한 것이나, 잘 아는 얘기를 쓰신다고 한 것 같은데.
해리(뜸을 들이다가): 실은 이번 희곡 소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야. 내가 잘 아는 형이 있는데, 그 형이 다니는 교회의 어떤 교인한테 일어난 일이야. 이야기가 드라마틱한 것도 있고, 또 세탁소란 배경도 흥미로웠고, 그래서 쓰게 된 거야.
상아: 그럼 이 이야기의 당사자가 오빠 희곡 내용에 대해 알게 돼도 괜찮은 거예요?
해리: 이번 희곡의 토대가 된 실제 인물들은 모두 시카고를 떠났어. 남편은 바람난 여자애 하고 둘이 LA로 떠났고, 그 여자애가 임신을 했다나 봐. 아내는 세탁소 정리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어. 생각해 봐라. 그 사람들이 어떻게 시카고에서 살겠어.
상아: 때로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하네요.
해리(킥킥대며): 정말로 그렇다니까.
연지(사이를 두었다가): 질문이 하나 있는데, 이번 연극을 통해 전하고 싶은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그게 뭐예요?
해리(술을 한 모금 마시고): 글쎄... 사실 난 희곡을 쓸 때 이번 연극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해야지, 하는 식은 아니거든. 그냥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고, 그 과정 가운데서 구체적인 메시지라기보단 이번 이야기 속엔 불륜, 배신,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다루니까, 그대로만 보여줘도 관객들 스스로가 어떤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훈(소주를 마신 다음): 난 형도 그렇고 창작을 하는 예술가들은 참 대단해 보여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해리(멋쩍은 얼굴로): 사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는, 어떤 있는 것에서 또 다른 어떤 있게 되는 걸 만드는 것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유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게 맞는 것 같아. (연지와 상아에게) 너희들은 어때? 시나리오 쓸 때 말이야. 어떤 식으로 영감을 얻는 것 같아?
상아(연지의 눈치를 보다가): 저 같은 경우는 오빠랑 약간 비슷해요. 저는 영화를 볼 때 감독을 기준으로 하거든요. 예를 들면 우디 앨런 감독이다, 그러면 애니홀, 맨해튼, 한나와 그 자매들, 미드나잇 인 파리,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 감독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보다가 보면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어떤 유사한 패턴이 보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 패턴을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저만의 스타일로 변주를 하고 발전을 시켜요. (사이) 저도 특별히 무슨 메시지를 전해야지 하는 강박은 없어요.
연지(족발을 한 점 먹은 뒤): 저는 약간은 다를 수 있는데, 저는 영화보다는 오히려 소설이나 시에서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제가 추구하는 영화 역시 뭐랄까, 대사 위주보다는 인물들의 표정이나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담는 걸 좋아하거든요. 자연이나 도시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것도 좋아하고요. 저는 가급적이면 제가 영화를 만들 때 의도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요.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이 그걸 만든 사람의 의도를 캐치할 때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상아: 여기서 문득 궁금한 게 있어요. (훈을 보며) 훈이 씨는 영화를 고를 때 주로 무얼 기준으로 하세요?
훈(생각을 해보다가): 저는 아무래도 배우 위주인 것 같아요. 흔히 말해서 흥행작이 많은 배우들이 나오면 그래도 신뢰가 가는 것 같아요. 그런 배우들은 수년에 걸쳐 그야말로 관객에게 크레디트를 쌓은 거잖아요. 그리고 또 영화가 개봉되면 관객들의 반응들이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 나오잖아요. 그걸 참고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소주를 마신 뒤) 저도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제가 예술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세 분 다 예술을 하시잖아요. 그러면 예술이라는 게 인간의 삶에서 꼭 필요한 건 가요? 아니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닐 수도 있는 건가요?
그의 말에 해리를 비롯해 연지와 상아가 모두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해리가 술을 자작해서 따른 다음 연지와 상아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는 훈이 막 잔을 비우자 훈의 잔에도 술을 부어주었다.
해리(머뭇거리다가): 예술이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왠지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화두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상아(소주를 마시고 족발을 먹은 후): 저 같은 경우는 우리의 삶에 예술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예술의 세계를 통해 경험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또 저는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도피처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사람들에게 훌륭한 도피처 역할을 하고 있고요. 이 세상에서 예술이 사라진다면 정말로 삭막하고 잔인한 세상이 될 것만 같거든요.
연지: 저도 상아랑 비슷한데, 예술의 역사나 기원만 보더라도 인류와 거의 함께 해왔잖아요. 인간이 많은 예술 장르를 탄생시키고 발전시켜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상아 말대로 예술은 도피처이면서도 동시에 안식처 기능도 하거든요.
해리는 그녀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해리: 너희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분명 무언가를 상상하고 어떤 형태를 빌려 그 상상을 구현해 내는 걸 염원하고 또 그걸 구현해 내니까.
훈: 저도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해보니, 음악, 영화, 연극, 미술, 건축 기타 등등 이게 다 예술인데, 이것들이 모두 사라지면 과연 뭐가 남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해리: 자 그럼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예술은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인간이 예술품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잔을 들며) 우리 그럼 예술을 위하여 건배하자.
그들이 잔을 들고 예술을 위하여,라고 말한 후 소주를 마셨다. 웨이트리스가 그들의 테이블로 와서 빈 접시와 빈 병을 집어 들었다. 그때 해리가 웨이트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해리: 저 근데... 제가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헤어스타일이 쇼트커트에다가, 그분 혹시 오늘은 일 안 하나요?
웨이트리스(순간 낯빛이 검게 변하며 거의 울듯할 표정으로): 도희를 말씀하시는군요... (더듬거리며) 그... 그게... 도... 도희는 죽... 죽었어요... 엊그제...
웨이트리스가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 해리는 너무나 난데없고 충격적인 소식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해리(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대체 그게... 무슨 말이죠..? 불과 얼마 전에... 커피숍에서 만났었는데...
웨이트리스(한숨을 길게 내쉬며): 사는 게 너무 힘들었나 봐요... 믿었던 언니한테 사기를 당하고, 돈이 없어서 학교도 못 다니게 되니까... 저도 오늘 자 시카고 데일리에 난 기사를 보고...
쇼트커트를 기억하는 훈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해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웨이트리스(눈물을 글썽이며): 그런데 도희랑은 무슨 사이이신지...
해리: 그냥 여기에서 보고... 또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좀 했었어요...
웨이트리스: 그러시군요...
해리(비통한 얼굴로): 어떻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일이...
침울한 기운이 그들의 자리를 순식간에 에워싸자 훈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그래도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또 살아가야 하니까. 여기 소주 한 병 더 갖다 주세요."
"네." 웨이트리스가 짧게 대답한 후 되돌아갔다. 해리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멍하니 쇼트커트가 주로 서 있던 주방 쪽을 바라봤다.
그는 심장 한쪽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했다. "돈이란 게 뭔지... 사람까지 죽이네요... 돈이 진짜 중요하긴 중요한 가 봐요.” 훈이 종업원이 막 가져다준 소주병을 따며 말했다.
“맞아. 돈이 중요하긴 중요한 거야...” 해리가 훈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예술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 삶에 존재하는지도...” 해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지는 그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타까움과 의아함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반쯤 남은 소주잔을 냉큼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