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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치 Aug 20. 2024

우연 - 어깨 위에 새들이 모여 앉듯 (5)

결국 나는 그에게 세 번째로 헤어지자고 말한 지 두 달 여 만에 다시 만나자는 전화를 세 번째로 걸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다른 것이 더 크게 보였다. 다르고 부족한 부분들이 아닌, 오로지 나를 온 힘을 다해 사랑해주고 있다는 것,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건강하고 단단한 내면이 드러나는 순간들, 그리고 웃을 때 고양이수염처럼 볼에 패이는 보조개까지. 다른 어떤 아쉬운 점도, 어려운 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날 나한테 준 꽃 말이야, 왜 하필 그 꽃이었어?”

꽃말을 알고 꽃을 주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혹시나 나에게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떨칠 수 없었기에 결국 물어본 것이다.


그의 대답은 실망스럽고 놀라웠다.


"그냥. 꽃집에 있는 것 중에 그게 제일 예뻐서."


이럴 수가.


우연이었다고?

그가 우연히 골라온 꽃의 꽃말을 내가 우연히 찾아보았고, 그것이 우연히도 ‘영원한 사랑’이었다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 우연에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려 심란해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사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그가 부모님의 과수원 농사를 돕다가 너무 지친 나머지 충동적으로 훌쩍 떠나온 곳에, 맡기 싫은 일을 맡아 심란했던 내가 즉흥적으로 정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여객항에 있던 많은 승객들 중 우리만 김밥을 샀든지, 아니면 김밥집 사장님의 추천 코스를 우리만 들었든지, 그와 우리 일행만 다른 길로 트래킹을 했고.(여기서 마치 시크릿가든의 길라임과 김주원이 된 것 같은 대문자 N의 상상이 더해진다)

내향적인 나는 그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먼저 말을 걸지 못했을 테지만 우연히도 한참 동안 물길이 열리지 않았고, 우연히도 우리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 모였고, 그와 그렇게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었다.

그렇게 만났던 그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이 헤어졌던 때에도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우연>>이었던 것이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우연만이 웅변적이다."라는 밀란쿤데라의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마치 초월적 존재의 계시인 듯 주술인 듯 한 우연들이 모여 잊히지 않는 각별한 사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은 코트 입은 그 남자와 비바람 치는 섬에서 처음 만난 지 10년 하고도 5달째 되는 날이다.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나는, 심한 날엔 잠결에도 나의 땀 냄새가 느껴질 때가 있다. 주말에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는 그가 나를 깨우러 오면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나의 땀 냄새가 신경 쓰이곤 한다. 여느 때처럼 나를 깨우러 온 그가 며칠 전엔 이렇게 말했다.

“여보한테서 달달한 벌꿀냄새가 나!”


풉, 이게 바로 꿀 떨어지는 신혼인가. 땀 냄새마저 벌꿀 냄새로 둔갑하는…

아마도 앞으로 수십년간 세월의 풍파를 맞아가다 보면 벌꿀 냄새조차도 땀 냄새처럼 느껴져 인상 찌푸려지는 날도 올 테다.

신혼의 패기일지 모르겠지만, 가끔 풋풋했던 지난 날들을 추억하며 손도 잡고, 뭉친 어깨도 풀어주고, 여름날 매미 소리 들으면서 산책하고 아이스크림도 사먹는 그런 다정한 부부로 늙고 싶다는 소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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