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상파 Dec 16. 2024

자유글 08

국회의사당을 다녀와서

국회의사당을 다녀와서 


탄핵이 가결된 날 딸아이와 국회의사당을 다녀왔다. 이삼 주 전부터 벼르던 터라 참여하지 못한 것이 심적인 빚으로 남겨졌는데 갔다 오니, 그것도 윤석열 탄핵이 가결된 날이라 뿌듯함은 말할 수 없었다. 국회에서 탄핵 투표를 서둘러준 바람에 센터에 가신 어머니를 형제들에게 맡기지 않고 갔다 올 수 있었다. 집에서 11시 못 돼 출발하여 광역급행버스 M 6410번을 타고 선바위역에서 내려 전철로 환승하여 동작역까지 갔고, 하차 환승 후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렸다. 


사람이 사방에서 밀려들어와 국회의사당과 공원 인근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필코 탄핵을 시키고 말겠다는 한 마음 한 뜻이라 사람들이 혈육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람들 표정이 해맑았다. 특히 부모 손을 잡고 있는 아이들은 잔치집에 온 것처럼 들떠있었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아이들은 부모 손에 이끌려 왔지만 세월이 흐르면 현장에서 받아들인 분위기를 개인적․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하여 자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런 부모를 둔 것을 자랑스러워할 날이 있으리라. 


어릴 적 나는 가끔 배운 게 없어 흙이나 일구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에게 삶의 등불이 될 수 있는 인생의 지혜를 말해주는 그런 부모를 가졌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가진 전답이 없어 소작농으로 뼈 빠지게 일을 하는 부모를 보고 있으면 탈출구가 없어 답답하고 앞이 막막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작심을 하지 못했다. 태어나 자라고 있는 농촌에서 살아야겠다거나 말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을 떠나가고 언니들도 그렇게 읍내 고등학교로, 서울로 직장을 잡아갔을 때조차 나는 내 앞날을 계획하지 못했다. 늘상 마음이 허전했던 나는 내 앞에 뻗어있을 길을 상상하지 못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삶은 그렇게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었다가 과잉된 자의식에 익사시키기 일보 직전으로 만들며 깊이 모를 혼돈과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했다.


목적도 없고 도회지로 나갈 생각도 없이 인문계 고등학교 소재지의 도시로 나가 살다가 나는 덜컥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늪을 만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심신이 얼어버렸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황장애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나의 심중을 헤아려준 이가 아무도 없어 외로움에 사무치기도 했다. 고등학교가 도회지에 있지 않았다면 딱히 시골을 떠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시골을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시골은 부모님의 일터였고 그곳에는 고된 노동과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생활이 있을 뿐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기고 때가 되면 떠나고 떠나서는 다시 시골로 돌아오고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만약에 집안이 조금은 여유로워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만이 아니라 내 이웃을 돌아보며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법을 알았다면 인생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까. 나라는 사람이 태어나 환대를 받지 못했고 자라는 환경이 가족애로 그리 끈끈한 것은 아니었으니 사람이 울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간이라는 사슬을 끌고 가기에 너무 버거워 자주 죽음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생동하고 성장하는 숱한 생명의 기운을 몸으로 감득하지 못하고 그저 지나치며 스스로 짓이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부지불식간에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뇌리에 똬리를 틀었고 나와 한 몸이 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그것은 나를 지배했고 50 중반의 이 나이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휘청거리게 한다. 어릴 적 나는 어느 세계에 놓여 있었기에 마음의 텃밭을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동토로 잠식시켜 버렸을까. 시간을 이탈하여, 아니 시간을 역행하며 자신이 무이기를 바랐던 것일까.


내가 좀 더 따스한 분위기에 안겨 황소바람 이는 윗목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 세상을 기껍게 받아들이며 과감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 어릴 때부터 사람이 힘이고 희망이라는 것을 몸소 깨닫거나 배웠다면 내 인생을 대낮처럼 밝히며 열정적으로 시간을 채우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삶의 좌표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점을 가리키게 되었을까. 적어도 시들어버린 배춧잎처럼 축 처져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사람들이 입고 온 색색의 옷과 울긋불긋한 깃발과 야광봉은 국회의사당 앞을 가을 단풍처럼 물들였다. 사람이 힘이고 희망인 걸 알게 된 국회의사당 앞에서 앙증맞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그들의 부모가 자랑스러워진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부모 밑에서 아이들도 자랑스럽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부모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다가 스스로 길을 내어 자기 발자국을 찍어가게 되는 것이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