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누나야〉와 청개구리 설화가 겹쳐지는 이유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와 청개구리 설화가 겹쳐지는 이유
이상하게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읽고 있으면, 동시처럼 들리는 말투와는 다르게 묘한 슬픔이 천천히 밀려온다. 강변에 살고 싶다는 말은 분명 명랑하고 순진한 바람이지만, 그 바람이 놓여 있는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비어 있다. 엄마와 누나를 부르는데도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고, 집 뜰에는 금모래빛만 반짝이고 뒷문 밖에는 갈잎이 바람에 스치며 서걱거릴 뿐이다. 사람의 기척은 사라지고 자연만이 드나드는 집.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의 빈자리를 감추고 있는 장면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청개구리 설화가 겹쳐온다. 어머니의 말을 거꾸로만 따르던 어린 개구리가,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비로소 강변에 무덤을 만들어주며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 그 설화 속 강변도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바람과 물소리만 남아 있던 곳이었다.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상실을 처음 마주하던 자리이기도 했다.
김소월의 강변과 청개구리 설화의 강변은 서로 다른 이야기에서 왔지만, 둘 다 유년의 결핍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풍경처럼 겹쳐진다. 시 속 강변은 아름답지만 어쩐지 생활의 온기가 없고, 설화 속 강변은 잃어버린 존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결핍이 마음에 남아 있으면 풍경도 그 결을 따라 변하는 법이다. 그래서 〈엄마야 누나야〉의 강변을 보고 있으면, 단순한 자연의 배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재가 은근히 스며 있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빌려 쓴 시지만, 그 안에 흐르는 정조는 아이의 천진함보다는 오히려 유년의 고독에 가깝다. ‘강변살자’는 말이 밝게 들리다가도,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 다시 슬픔이 스며든다. 청개구리 설화의 강변이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결핍의 정서는 서로를 알아보고, 비슷한 풍경을 끌어다 겹치게 한다.
그래서 내가 이 시를 읽을 때 떠올리는 강변은, 아이가 뛰놀던 물가가 아니라, 어머니를 잃은 청개구리가 울음을 삼키며 머물던 그 강변이다. 바람만 드나드는 자리, 누군가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조용해지는 자리. 김소월의 강변도 그런 풍경을 닮아있다. 밝은 말 속에 은근한 그늘이 있고, 자연의 소리 속에 사라진 사람의 숨결이 배어 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저릿해온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