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빌런 Part 5 : 빌런 중의 빌런. 최상위 포식자들
빌런이라기 보단 병들어 아픈 환자들
오피스 게임 빌런들 중 공격, 스킬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최상위 포식자들이 있다. 상사 아부는 기본 장착이다. 줄 대기도 잘한다. 업무력도 받쳐준다. 진급력도 좋다. 이들은 다른 무리들에 비해 높은 확률로 임원에 등극한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괴물이다. 정상으로 보이지만 마음의 깊은 병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의심병자 : 의심이 아니라 확인하는 거야!
업무 스타일은 디테일이 좋다. 다만 속도가 느리다. 의심이 너무 많아서다. 의심은 병이라고 했던가? 맞다. 이들의 패시브 스킬은 의심이다. 액티브 스킬은 사람 테스트, 크로스체크, 흠잡기다. 이들은 아무도 못 믿는다. 물론 사람은 믿을게 못 된다. 근데 상황 봐서 적당히 가리면 되는데, 의심병자는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본다.
"진짜야? 아니야?"
"내가 저번에 말했어? 안 했어?"
"일주일 전에 한 거 확실해?"
"이거 체크했어요? 안 했어요?"
"얘기한 거 만약 아니면 어쩔 거야?"
"예대마진 276$이야? 맞아? 어젠 275$이래매?"
이들의 화법은 진실공방과 양분화가 주를 이룬다. 업무 논의 중에도 포커스는 기야 아니야에 맞춰져 있다. 그 내면의 전제가 의심이기 때문이다. 의심병자들은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렇기에 과감하지 못하다. 쫌스럽다. 후임이 이러면 답답하지만 일처리는 안정적이다. 동료가 이러면 손절각이다. 문제는 상사가 이러면 매시간 의심을 받는다. 하루하루가 노이로제 병맛이다. 점점 삶이 피폐해진다.
외근 나간다고 하면 태클이 걸린다. 안 나가도 되지 않냐 묻는다. 진짜 나가는 거 맞냐 이 얘기다. 거래처에 전화해서 몇 시에 끝났는지도 확인한다. 견적 조사 업무를 2~3명한테 따로 시킨다. 누가 잘하는지 보려는 게 아니다. 누가 대충 해서 오는지 가리기 위해서다. 보고서를 올린다. 이 보고서 직접 쓴 게 맞는지가 궁금하다. 짜집기 한 게 아닌가 궁금하다. 직접 썼든 짜집기든 안에 내용이 중요한 거 아닌가?
이들의 뇌구조는 일반인과 다르다. 크로스체크를 업무 시작부터 마감까지 여기저기 구석구석 아주 오지게 처박고 남발한다. 그러다 체크 잘 안 된 부분 하나 나왔다. 흠잡기 들어가는 이런 형태다. 하나 걸리면 다시 다 컨펌받는 거다. 아. 젠장..
이들에게 매일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확인해 보겠습니다."이다. 전반적인 흐름을 못 보고 기야 아니야만 따져댄다. 맞는 걸 얘기해도 맞아? 아니야? 하면 자신이 없어진다. 만약 아니면 뭔가 딜이 꽂아 박히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무조건 확인하겠다는 대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뻔한 거라도 그냥 확인한다고 하자. 대충 10분 때우고 다시 맞다고 해 주면 된다. 의심병자는 진짜 확인이 필요해서 기야 아니야를 묻는 게 아니다. 자기 불안을 확인이라는 방법으로 떨쳐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나날들이 계속된다. 반복된다. 일상이다. 피곤하다. 숨 막힌다. 피폐하다. 못하겠다. 나갈랜다. 퇴사한다. 굿바이다. 의심병자에게 당하는 오피서들의 패턴은 보통 이 순서로 게임 오버를 맞는다.
의심병자는 한 번에 갈 길을 꼭 두세 번 거쳐 가는 비효율을 택한다. 실은 그렇게 불안을 극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오피서들의 정신세계가 박살 난다. 미치광이가 되어간다. 용도는 그냥 자기 불안 극복용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이 의심병자. 그러나 의외로 중용된다. 일처리가 안정감 있다. 정확해 보인다. 윗분이 미처 체크 못한 큰 거 하나 발견해 낸다. 그렇게 눈에 든다. 매니저의 위치 정도는 올라가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 과감히 지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서는 의심에 지쳐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그래도 관리자의 자리에서 오래 버티는 재주가 있다. 다만 그들의 오피스 게임은 통상 거기까지다.
사실 이들은 스스로도 매우 피곤하다. 아닌 척할 뿐이다. 기야 아니야 프레임에 갇혀 사는 이들. 어떤 말을 해도 답이 없다. 의심병자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딱 6개월을 투자하면 된다.
저들의 피곤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신뢰 프레임을 씌워버리면 된다. 의심병자는 무조건 사람을 테스트하려고 든다. 이때부터다. 최대한 정확하게 소수점까지 대답해라. 뭔가 기야 아니야를 묻거든 닥치고 “확인하겠습니다!”부터 시전 하자.
확인한 건은 아까와 맞아야 한다. 좀 늦어지고 힘들어도 매사에 알아서 크로스체크 박고 시작하자. 그렇게 딱 6개월. 적어도 나한테 만큼은 의심병이 사라진다. 그때부턴 맘대로 해도 내버려둘 것이다. 의심병 대상은 다른 이에게 옮겨 붙어간다. 실은 모든 이를 의심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테스트 기간 신뢰 프레임을 씌워주면 그다음부터 의심병은 오지 않는다. 단, 이 기간 신뢰 프레임을 씌우지 못하면 게임 오버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6개월만 피곤하다 말 것인가? 5년 정도 매일 진실게임을 해볼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회아일체 : 회사가 먼저야! 회사가 곧 나야!
회사가 좋다. 회사를 사랑한다. 회사가 전부다. 이름하여 회아일체! 오피스 게임 애사심 끝판왕이다. 회사와 내가 한 몸이 된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충성심은 100+이다. 연봉을 깎아도 떨어지지 않는다.
공격력도 좋다. 업무력도 평타 이상이다. 방어력도 좋다. 근면성실은 기본. 배터리 방전에도 알아서 잘 채워온다. 미진한 업무. 갑자기 시킨 업무. 이런 건 아무 문제없다. 남아서 하면 되니까. 야근 그거 뭐 그리 어렵다고. 그 와중에 골프도 열심히 익힌다.
취미는 야근, 특기는 주말근무. 패시브는 애프터서비스다. A/S는 몸빵으로 하면 된다. 독문 필살기는 주인의식이다. 필살기 주인의식은 모든 노비들의 대항을 이겨낸다. 배터리를 무한으로 채워준다.
회아일체의 경지는 아무나 오르지 못한다. 이들의 자아는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내면 공식이다.
1. 회아일체의 내면 자아 공식
나 = 회사, 회사 = 상사, 나 ≠ 상사
A=B이고 B=C일 때, A는 C가 아닌 특이한 공식 성립
2. 회아일체의 성삼위일체 충성 공식
태양 = 오너, 오너 = 회사, 회사 = 태양
태양왕은 루이 14세이며 짐이 곧 국가이나, 여기서는 태양과 오너와 회사는 한 몸이 됨
회사에 있을 때 정서적 안정을 느낀다. 코로나 격리 기간 누가 회아일체인지 한눈에 드러났다. 재택 하라는 회사의 지시와 발표. 충성심으로 중무장한 이들이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 감염과 사망의 위기 속 얇은 마스크 한 장으로 주위의 좀비들을 물리쳤다. 이들은 회사에 나왔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표면은 말한다. “회사 위해서!” 내면은 말한다. “가고 싶어서!” 그렇다. 그냥 편안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회아일체는 기본 자아구조가 다르다.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회사는 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근본조차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자아를 꾸역꾸역 회사에 밀어 넣어 억지로 일치시킨다.
이쯤 되면 거의 종교다. 회사 밖에서도 회사 로고 배지를 찬다. 좋은 옷은 회사 갈 때 입는 것이다.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회사다. 회사에 인생을 갈아 넣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 직장인은 다 짤라버려야 한다. 모범사원 상장 한 두 번은 꼭 받는다. 집에 걸어둔다. 웬만해서 승진에 밀리지 않는다. 상사를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긴다. 동인도회사의 노비학개론에 나오는 가장 형이상적인 모델이다. (검색하지 마라. 그런 책 없다. 초맹이 쓸 거다.)
"회사가 장난치는데야? 회사가 우스워?"
"일처리가 왜 이래? 애사심 가지고 고민하란 말야!"
"요새 분위기 안 좋네. 회사가 잘 돼야 하는데 말야.."
"내 몸 같은 회사인데, 당연히 회사가 우선이지!"
이들의 화법을 잘 들어보면, 회사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근데 이들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톤이 다르다. 진정성 깊게 배어 있다. 푸념을 해도 내용은 회사 걱정이다. 아부가 아니라 찐이다.
회사는 당연히 이들을 중용한다. 팀장, 관리자 레벨은 무조건 올라간다. 딱 거기까지다. 보통 이들의 오피스 게임은 관리자에서 끝난다. 꼬리 자르기나 책임전가, 독박의 희생양이 된다. 자고로 희생양은 충견을 골라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임원에 올라가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한다. 적이 많고 경계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 회사 위하는 모든 오두방정을 다 떨었으니 이미 주위가 편안할리 없다. 손에 묻힌 피가 너무 많다. 그때서야 보인다. 손이 왜 그렇게 시뻘게졌는지..
노비는 위에 잘 보여야 하고, 임원은 아래서 잡음이 나면 안 되는 법이다. 회사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면서 이래도 되는 거냐고? 미안하다. 노비학개론의 엔딩은 원래 부장까지다.
신입 때는 1년 간 무조건 애사심 버프가 붙는다. 회아일체인지 그냥 초짜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진정한 회아일체는 보통 대리 때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이미 나의 상사일 가능성이 높다. 진급력이 좋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피스 게임 중반 최강자로 군림한다.
회아일체는 상대하기 힘들다. 이들에게서 해방될 수 없다. 가능한 엮이지 마라. 상대할 때는 맞장구만 쳐라. 후임이나 동료라면 돌려까기로 적당히 차단하면 된다. 직설이나 회사 욕은 하지 마라. 이들에게 회사 욕은 자신을 욕하는 거나 다름없다. 회사 위한답시고 뒤에서 나를 디스 하며 나쁜 소문내고 다닐 확률이 높다. 죄명은 신성모독이다. 신성모독은 마녀사냥이고 조리돌림에 화형이다. 알지?
회아일체가 상사라면 무조건 맞장구만 쳐라. 믿습니다 해 줘라. 사이비종교는 빠질수록 나락 가는 속도도 빨라진다. 어차피 같은 상사 3~4년 이상 모실 일도 많이 없다. 그럼 그냥 쉽고 편한 길을 택해라.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는다. 굳이 깨달음의 길로 인도할 필요 없다.
회아일체는 회사에 희생양으로 몰려도 잘 나가준다. 권고사직인데도 용퇴라고 여긴다. 회사 위해서. 고작 한 두 달 치 위로금에도 감사한다. 회사에 뒤통수 맞아 집에 간 후, 6개월이 지나면 알아서 깨닫는다. '아.. 인생을 착각 속에 살았구나.', '나는 회사가 아니었구나.' 사이비 종교에 심취했던 그들의 믿음은 허무하게 깨진다.
의심병자와 회아일체. 이들을 상대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가 아니라 병원에 있어야 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은 싸워서 쓰러 뜨리는 게 아니다. 불쌍히 여겨 주는 게 예의다. 굳이 의사가 되어 저들을 치료해 줄 필요 없다. 의사가 아닌 자가 의료 활동을 하면 반칙이다. 게다가 부작용까지 난다.
그러니 그냥 냅둬라.
오피스 게임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자본주의 오피스 게임은 원래 차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