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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맹 Jul 08. 2024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제 떠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로그아웃하는 오피서들의 마지막 인사


"내가 더러워서 관둔다!" "조만간 사표 낸다!"

주변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근데 이런 애들은 죽어도 안 나간다. 오피스 게임 불변의 진리다.


연말. 연초. 많은 메일이 온다. 대부분은 뭘 언제까지 하라는 스팸 같은 독촉성 메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도 많이 온다. 그렇다. 퇴사 인사다.


이 퇴사 인사도 제각각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다 인사하고 돌아다니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특히나 코로나 시기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메일을 많이 쓰는 편이다. 이 퇴사 메일만 봐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가 보인다.


동료들에게 축하를 받는 퇴사가 있다.


근속기간이 짧은 이들은 아는 사람도 얼마 없어 소박한 로그아웃을 맞이한다. 이 경우는 이 게임 아니다 싶어 빠른 이직을 하는 케이스다. 보통 조용히 나간다. 메일 그런 거 보낼 일도 없다.


반면 근속기간이 긴 자들은 자꾸 뭔가 흔적을 남겨대려는 의지를 보인다. 퇴사 한두 달 전부터 이 부서 저 부서 놀러 다니며 인사를 전한다. 오래 다닌 만큼 아는 사람도 많은 탓이다. 그마저도 다 돌지 못해 메일로 인사를 남긴다. 어떤 이들은 추억이 발동했는지 여러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대략 패턴은 이렇다. 비슷하다.


퇴사를 앞두고 늦게까지 혼자 남아 감상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초맹 은행인이 되어 20년을 살아왔습니다. 회사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맛보고, 때로 반복되는 야근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상사를 안주삼아 한잔 술에 날려버린 스트레스! 출시한 금융 상품이 대박 터지던 날! 돈이 안 맞아 비상으로 날밤을 지새우던 기억! 퇴사를 앞둔 지금은 모두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 간 여러 선후배님들의 배려와 가르침을 되새기며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발짝 앞으로 향합니다. 비록 저는 떠나가지만 언제나 마음은 초맹 은행과 함께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모든 하시는 일의 성공을 맛보시기 바라며, 초맹 은행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메일은 보통 하루 이틀 전에 작성해 둔다. 그리고 작가인 양 퇴고를 엄청 해 댄다. 마지막 이미지까지 신경 쓴다. 다 되면 예약 메일을 날린다.


당일 날은 퇴사 절차 밟고 이것저것 PC부터 집기들을 반납하면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수신자를 보면, 핵인싸들이 퇴사할 때는 전체 수신을 건다. 모르는 사람들까지 다 포함이다. 나의 퇴장을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의 발동일까?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한 명 한 명 떠올려가며 수신자에 이름을 쳐 넣는다. 만약 거기 내 이름이 들어있지 않거든 그동안 혼자 짝사랑한 거라 생각하면 된다.


사람에 따라 좀 다르지만, 아싸들은 보통 그냥 두 세줄 정도 별 의미 없이 형식만 취한다.

'이달로 퇴사하게 되어 메일로 인사를 남깁니다. 직접 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한 점 너그러이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퇴사를 다같이 위로해 주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나가느냐 이 퇴사 과정에 따라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떠밀려서 나가는 자는 보통 말이 없다. 이들은 심경이 그만큼 복잡하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경우가 많다. 주변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조용한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당히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자는 퇴사의 그날까지 떳떳하다. 이들은 그전부터 이직이던 사업이던 충분한 준비를 한 자들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이다. 자기 어디 좋은 데 간다고 크게 떠벌리고 다니며 남은 자들을 루저 취급하기도 한다. 이들의 인사는 대략 이런 식이다.


"저도 가기 싫었는데 자꾸 사과은행에서 계속 와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게 되었어요. 연봉 차이도 꽤 크구요. 아무래도 초맹은행보다는 사과은행이 훨 낫잖아요. 여러분들도 열심히 하다 보면 이렇게 좋은 날 옵니다. 아하하하!"

들은 이들은 앞에서는 잘됐다 좋겠다 하지만 속으로 다들 배 아파한다. 배알이 마구 꼬인다. 재수 없다.


이 헬게이트에서 잘 해 봐! 난 좋은 회사 간다! 부럽지?


근데 가만 보자. 임원들의 퇴사 메일은 어떤 식일까? 대부분 안 보낸다.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임원들은 나갈 때 인사를 잘 안 한다. 퇴사 메일도 잘 안 보낸다. 그건 사장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오래 있을 만큼 충분히 있었고, 아는 사람은 더 많을 텐데..

임원들은 아래 팀장들 불러서 조용히 소식을 얘기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짐 싸고 나갈 때까지 보안 유지를 당부한다. 그리고 그냥 출근을 안 한다.


오피서들은 임원들에게 퇴사 소식을 직접 듣기보다 풍문으로 듣는 경우가 더 많다. 아주 하는 것마다 끝까지 밀실 플레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쪽팔려서다. 존심이 상해서다. 보스의 힘을 잃어서다. 노비들에게 쥐어 터지게 생겨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년 사업계획 준비하라고 떵떵거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주변 시선을 더 의식하는 이들의 퇴사가 통상 아름답게 끝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임원은 해임 통보를 받으면 바로 빤스런이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했던가? 그토록 횡포 부리며 부려먹은 노비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을 정도로. 아닌가? 앞으로 내 노비도 아니고 도움 될 일도 없다 이건가? 그래서 빤스런 치는 것인가?


어쩌다 정신줄 부여잡고 마지막 메일을 써서 보내고 나가는 임원들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분량과 상관없이 그냥 뻔한 얘기다. 요새 핫하다는 초맹 AI로 요약해 보자.

[ 임원 퇴임 인사 메일 초맹 AI 요약본 ]  
난 평생 몸 바쳐 늘 최선을 다해 일만 했다. 더해먹고 싶었지만 집에 간다. 잘 살아라. 끝.

이들의 메일은 인생을 다 갈아 넣었음을 인정받고자 동일한 패턴으로 시작한다. 퇴사 이유는 밝히지 않는다. 형식적인 인사와 건승을 빌며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형태다.


그래도 해 먹을 만큼 다 해 먹고,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네놈들의 야욕과 권력에 희생되고 고통받은 오피서들에게 용서라도 구하던가, 그게 힘들면 사죄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노비들의 반란? 순순히 집에 가기는 힘들 것 같다.


모든 오피서들은 언젠가 로그아웃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로그아웃을 언제 어떻게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오피스 게임은 계속되는 거겠지.


다만 오피스 게임은 로그인을 할 때도 그리고 로그아웃을 할 때도, 사람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게 게임의 법칙이다.


제목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신 : 오피서 전체

열심히 일한 오피서들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보상과 명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헌신의 길을 걸어온 워킹맘들이 받아야 할 박수와 찬사가 억눌려오던 차별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회사의 미래가 될 청년들이 꿈을 잃고 찾아오지 않는 기회에 방황하던 모순된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대의 경제를 이끈 주역들이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회사에 사형 선고를 당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누군가의 야심과 욕망에 짓밟히는 불운한 오피서들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 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노비가 아니라고 얘기합시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겠다고 얘기합시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얘기합시다!


저는 이제 이 제국주의 오피스 게임을 뒤로하고, 오피서들의 영광과 행복을 되찾아 주기 위해 앞장설 것을 다짐합니다. 오피서가 영광을 누리는 곳, 오피서가 행복한 곳, 오피서가 사람답게 사는 곳. (주)초맹으로 다 같이 함께 떠납시다.

...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내 마지막 오피스 게임 로그아웃 인사 메일은 이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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