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마! 그거 다 거짓말이야!
회사가 여론을 조작하는 대표 방법론
회사에서 직원들의 의견을 조사할 때가 있다. 사명 변경, 직원 복지, 성과 보상, 프로세스 개선, 사옥 이전 등 다양하다. 직원들 의견을 조사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오피서들에게 꿈과 행복이 넘치는 회사를 만들어 성과를 향상하겠다는 의도다. 좋다. 다 좋다. 돈은 그렇게 벌어야지.
문제는 그런 순수한 의도로 의견 조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회사가 직원 여론이나 의견을 조사할 때 이유는 크게 2가지로 갈린다.
머리가 비었거나! 머리수로 밀고 싶거나!
윗선에서 뭔가 지시했는데, 이를 수행하는 부서가 아이디어가 없거나, 지들이 하고 싶은 것을 직원 의견으로 포장하고 싶은 경우다.
사내 게시판에 주제가 뜬다. 짜잔!
새로운 도약! (주)초맹이 강남 시대를 열어갑니다! 사옥 이전 후보지에 대한 사우님들의 의견을 받습니다. 어디가 좋을까요?'
1. 강남역 2. 삼성역 3. 선릉역 4. 역삼역
이렇게 투표를 시킨다. 근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객관식으로 프레임을 심어놨단 말이다. 왜 강남으로 한정하는 건데? 강남이면 신사, 양재는 왜 없는데? 그래 뭐 일단 그렇다 치고!
나중에 한참 지나서 사옥 이전지가 결정된다. 결정되는 곳은 투표순이 아니다. 그냥 대충 가격 맞고 머리수 수용되는 곳을 찾은 결과일 뿐이다. 오피서들은 대개 자기 출퇴근이나 생활권을 반경에 두고 투표한다. 무슨 소리냐? 애초에 투표 자체가 무의미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의견을 왜 받는 것일까? 적당히 알아보고 사옥 이전했다고 하면 추진 부서가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직원들 의견을 경청한 결과라고 쑈를 하고 싶은 거다. 이런 거 목매서 할 필요 없다. 부의 상징 강남? 아서라. 사옥 건물은 니께 아니다. 너에게 중요한 건 삐까뻔쩍한 회사 건물이 아니라, 지금 니 손에 들려있는 점심용 김밥 한 줄이다.
다음 주제가 뜬다. 빠밤!
'즐거운 회사를 만들기 위한 여러분의 생각을 얘기해 주세요! 모두의 참여가 내일을 만들어갑니다.'
요따위 공익광고 캠페인스러운 주제는 무엇일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다. 이런 건 맨 위에서 오너가 "뭐 재밌는 거 없어? 난 말야! 직원들에게 정말 잘해주고 싶거든. 어떻게 해야 즐거운 회사가 되겠어?" 이렇게 아래로 흘렸을 때다.
물론 오너의 말도 거짓말일 공산이 크다. 오너는 그런 거 관심 없다. 며칠 전 현장 가서 어깨 토닥 자기랑 밥 먹은 직원도 기억 못 하는 게 오너다. 다만 자기 이미지 관리에는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지시를 받은 임원들은 뭔가 액션을 해야 된다. 근데 생각이 없다 이거다. 그걸 전가하는 방법이 바로 공익광고 캠페인 되겠다.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에 직원들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 이 경우 문제는 주관식 서술형으로 출제된다. 참여율은 당연히 엄청 떨어진다. 팀장들은 임원들에게 쪼임을 당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쥐어짠다. 이런 것에 잘 낚이는 노비들은 사원부터 대리들까지다. 그리고 입신양명을 꿈꾸는 야심가들이다.
짜잘하고 쓰잘데기 없는 아이디어들이 밀려 들어온다. "즐거운 회사 생활? 돈이나 좀 팍팍 주세요! 사람이나 더 뽑으세요! 일 좀 줄여주세요! 복지카드 연 1,000만 원 넣어주세요!" 이런 것도 들어오는데 다 스킵한다. 아. 누군지 확인해서 옐로카드 란에 따로 적어는 둔다. 익명이래매? 아니다. 믿지 마라. 오피스 게임에 익명이란 없다. 그래서 오피서들이 블라인드로 가는 것이다.
결국 뭔가 해야 하기 때문에, 그중 돈 안 들고 쉬운 걸 선택한다. "즐거운 회사를 만들기 위해 동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세요! 한 달에 한번 롤링페이퍼 들어갑니다." 이런 식이다. 두세 달 하면 이제 롤링페이퍼도 복붙 한다.
그렇다. 오히려 더 귀찮아졌다. 직원 의견을 수렴한 게 아니라 오너 의견을 수렴한 것이다. 이렇게 벌린 일들은 1년 안에 스리슬쩍 사라진다. 만약 저런 아이디어를 영상까지 찍어가며 내 달라고 호소한다? 중요해서가 아니다. 익스트림리 궁하다는 신호다. 그럴 때는 위에서 한번 내리찍었구나 생각하면 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 한두 명만 얻어걸려라!
직원 의견을 구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회사의 입장에서 민감한 사안인 경우다. 회사 이미지와 직결되어 있다거나 돈이 많이 들어가게 생긴 경우다. 이때는 대부분 직원 의견을 경청하게 된다. 신중한 회사구나. 좋은 회사구나. 아니다. 결코 그래서가 아니다. 이 경우 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
오너는 회사의 운명을 절대 노비에게 맡기지 않는다. 위에서 몇 명이 정한 답을 확인해 보고 싶은 거다. 아니면 태세전환을 해야겠으니 정해졌다는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나중에 문제 생기면 위에서 내빼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정해놓고 끼워 맞추는 수법이다. (주)초맹. 회사이름이 초맹이 뭐냐 초맹이! 없어 보인다. 진작부터 이런 얘기는 심심찮게 들려왔던 터다. 공지가 올라온다.
'(주)초맹이 새로운 사명으로 내일을 선도하며 도약하고자 합니다. 새롭고 참신한 사명 공모를 받습니다.' 이때는 채택 시상금이 걸린다. 사명 하나 짓는 게 몇 글자 안 되니까 참여율이 꽤 높다. 돈도 준다잖아. 새로운 사명과 의미를 작성해서 접수를 받는다.
초맹엔지니어링, 초맹이앤씨, 초맹바이오솔루션, 초맹생명, 초맹뱅크, 초맹라이프, 초맹에너지. 별 게 다 나온다. 한 명이 10개도 넣는다. 대부분은 앞에 그 ‘초맹’을 못 버린다. 그 와중에도 혁신을 고수하는 혁명주의 공모자들에 의해 아예 새로운 사명도 접수된다. 사명에서 아예 초맹을 없앤다. 초아이디얼컴퍼니, 조은누리은행, 우리두리에너지, 센세이션바이오 이런 식이다. 이 급진 혁명파들은 조선 왕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자들이다.
결과는 양쪽 둘 다 안 된다. 초맹을 바꾸려는 것인데 사명에 초맹을 쓰니까 안 된다. 그럼 사명에서 초맹을 송두리째 뺀 네이밍이 선정되느냐? 아니다. 그럼 뭐냐?
정답은 CM이다. 왜냐? 초맹의 사명을 아예 지워버리면 불경죄에 걸린다. 이는 선조들을 부정하는 짓이다. 한글로 쓰면 올드하다. 영어는 선진회사 같다. 그래서 둘 다 잡을 수 있는 건 그냥 영문 이니셜이다. ‘CM’ 이렇게 하는 거다.
"CM은 초맹을 살려 전통을 계승하고, Creative! Momentum! 창의성과 추진력으로 뻗어나간다는 초맹의 미래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렇다. 이미 정해놓고 의미를 부여한다. 로고를 디자인하기 위해 컨설팅 회사를 동원한다.
그럼 사명 공모는? 몇 명 비슷한 거 응모한 게 있다면, 그걸 같이 응용해서 만든 거라고 둘러치고 끼워 맞춘다. 그래서 직원 의견을 반영한 세련되고 미래지향적인 사명은 죄다 영어 이니셜이 되는 것이다.
만약 조선의 새 이름을 공모한다고 관아에서 방을 붙이거든, 반드시 CS K&D (ChoSun Kingdom&Dynasty)라고 써서 공모해라. 무조건 될 것이다.
답정너에는 간 보다가 끼워 맞추는 방법도 있다. 주로 성과 보상이나 연봉, 직급 체계를 뒤흔들 때 사용된다. 성과급을 줄이고 싶다. 이미 시뮬레이션을 해 본다. 사업부마다 목표 성과 다 따져본다. 성과 차등을 미리 예상한다.
사업부 몰빵 성과제를 하면 초과 성과 부서가 많지 않다. 성과급이 팍 줄어든다. 근데 바로 시행을 때리자니 노비들의 심한 반발이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로 직원 의견을 수렴한다. 이쯤 되면 눈치챘지? 당연히 의견을 반영해 주려는 의도는 아니다.
"현 성과급 제도의 문제점과 좋은 의견을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그럼 분명히 의견이 나온다. 실적이 좋은 부서는 성과급 차등을 더 하자고 한다. 실적이 나쁜 부서는 현재에 만족한다고 하거나 평등하게 하자고 한다. 그렇다. 노비가 뭉치지 못하도록 갈라치기를 시전해 버리는 것이다. 양쪽의 의견 비율을 살피고 성과주의를 내세워 더욱 차등! 이렇게 제도 변경 발표를 한다.
"회사가 지향하는 성과주의 그리고 직원들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 성과급 차등 격차를 더욱 넓히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웃긴 건 이미 의견은 자기들이 다 선별해서 필요한 것만 붙여둔 채, 전체 결과 공개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원들은 저 의견이 맞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갑다 하고 당하는 거다. 확인은 매우 간단하다. 성과급 지급 시 그전 제도와 따져서 전체 지급 액수가 줄었나 늘었나만 보면 된다. 대부분 줄었을 것이다.
오피스 게임에서 회사가 여론이나 의견을 받는 이유는 대부분 이 범주에 있다. 회사가 노비들의 의견을 조작하는 루트이기도 하다. 직원들의 여론이라고 하면 무게가 실리고 힘을 얻기 때문이다. 이거 한다고 뭐가 좋아지려나보다. 회사를 위해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한다거나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할 필요 없다.
의견 수렴을 할 때는 그냥 밀린 일이나 하면서 그냥 지켜보자. 그걸 주도하는 자가 누군지 왜 하는지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면 보일 것이다. 회사가 노비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어떻게 조작해 먹는지 말이다.
P.S. 근데 초맹이 진짜 별루야? CM이라고 바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