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 기분이 더럽다. 내가 이런 말을 쓰면 극성맞은 아들, 딸은 엄마 말 좀 예쁘게 하라고 잔소리들을 해대지만, 자기들은 얼마나 고상한 단어를 쓰길래 감히 엄마한테 지적질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 내 기분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더럽다.
며칠 전 하준의 학교 잠바 사건은 이미 마음을 접어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하진이 말도 안 되는 모의고사 점수를 받아왔지만 이미 그 아이에 대한 기대는 많이 접은 상태라 내 기분을 더럽게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내 기분이 더러워진 건, 오늘 아침 눈치를 옆집 강아지에게 줘버린 듯한 남편의 태평한 한마디 때문이었다.
평소 새벽같이 출근하는 남편의 기상시간을 내가 맞출 순 없기에 남편은 조용히 일어나 대충 끼니를 때우고 출근하고는 하는데, 요즘엔 갱년기가 오려는지 어쩌려는지 오늘따라 그 새벽 같은 시간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식빵 두 조각을 구워주고 아침 먹는 남편의 앞에 자리 잡아 앉은 게 화근이었다. 남편 역시 평상시와 다르게 식탁에 마주 앉은 내가 불편했는지, 땅콩잼 바른 토스트를 꾸역꾸역 불편하게도 먹었다. 어떻게든 답답하게 내려앉은 침묵을 그도 깨고 싶었는지 억지로 할 말을 떠올리는 것 같더니 드디어 할 말을 찾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맞다, 당신 상현이 기억하지? 내 고등학교 친구. 걔 아들도 이번에 수능 봤나 봐. 기억해? 하준이보다 한두 살 많았던 것 같은데."
기억 하다마다. 소심한 남편의 몇 안 되는 친구 상현씨네 가족과는 집도 가깝고 가족 구성원도 비슷해 아이들이 어린 시절까지는 같이 여행도 종종 가는 꽤 가까운 사이였다. 상현씨네 첫째 아들은 하준이보다 한 살 많은 형이었고, 둘째인 딸은 하진이와 동갑내기였으니. 애들이 크고 우리가 학군지로 이사를 오며 점점 멀어져 소식이 자연히 끊겼었는데, 남편이 실로 오랜만에 그쪽 가족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 집 아들은 하준이보다 한 살이 많아 수능을 쳤어도 작년에 쳤어야 하는 건데, 재수를 했구만, 어릴 때부터 공부머리는 아니었지,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말해보라 남편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은..은... 이름이 뭐였더라."
"은우."
"그래, 은우. 걔가 이번에 수능을 쳤는데,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더라고."
"뭐? 의대? 서울대??"
새벽잠이 확 깨는 남편의 돌발선언에 머리가 띵해졌다. 의대라니. 그냥 의대도 아니고 서울대 의대라니. 꿈인가, 이 양반이 허언증이 있나 싶어 다시 되물었다.
"은우? 그 상현씨 첫째 아들? 알파벳도 못 떼던 그 은우?"
남편은 내 반응을 보고 그제야 말 잘못 꺼냈다는 눈치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상현이 첫째 아들 은우. 알파벳을 뗐는지 못 뗐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어쨌든 그 은우."
"걔가 어떻게 서울대 의대를 갔대? 학군지로 결국 이사 간 거야? 그때 자기들은 뭐 이사 안 갈 것처럼 굴더니."
남편은 점점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했다.
"이사 안 갔어. 그때 거기 그대로 살아. 어제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얘기했는데, 애들이 잘 컸더라고. 그리고 딸은 과학고 다닌다고 하대."
"뭐? 그 동네에서 서울대 의대를 갔다고? 뭐? 잠깐, 걔 동생 은아? 우리 하진이랑 친구? 어릴 때 색칠놀이도 제대로 못 해서 크레파스 다 튀어나오게 색칠하던 그 은아가, 어디를? 무슨 일이래, 무슨 수로. 확실해?"
남편은 나의 커지는 목소리와 쏘아붙임에서 도망가듯 식탁에서 일어나 말했다.
"무슨 수긴. 공부 열심히 했겠지. 회사 다녀올게, 잘 먹었어."
남편이 남기고 간 대형 폭탄을 오롯이 혼자 껴안은 난, 하루종일 기분이 더러웠던 것이다. 폭탄 한 개도 아닌 두 개. 역대급이었다.
사실 상현씨네와 사이가 실질적으로 멀어진 건, 은우엄마와 나의 성향차이 때문이었다. 아니, 은우엄마의 성격이 조금 유별난데가 있었다.
하준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우리 동네에 처음으로 '영어유치원'이란 것이 들어섰다. 아파트 옆 큰 건물 맨 위층에 어딘가 부족한 장난감백화점이 있었는데, 처음엔 아기 손님들로 조금 북적대다가 점차로 손님이 줄어들더니 장난감에는 먼지가 소복소복 쌓이며 결국 임대문의 딱지를 붙는 신세가 됐다. 저긴 뭐가 새로 들어와야 될 텐데, 싶던 중 그 자리에 영어유치원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건물 벽면을 가득 채웠던 현수막의 문구가 여태 기억난다.
"00유치원 AA에 전격 입성! 아직도 영어유치원 입학을 고민하시나요? 어머님들의 고민 해결을 위해 00영어 유치원 설명회를 개최합니다. - 강남 00유치원 출신 원장"
현수막 제일 아래에 적힌 핸드폰번호를 저장하면서 하준의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 그래도 영어유치원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우리 동네에 그것이 생겼다니, 좋은 정보니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사실, 영어유치원을 보자마자 요동치는듯한 심장에 다른 엄마들도 같이 흔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게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준의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과 설명회 날짜를 확인하며 같이 가보자 약속을 잡는 중에 문득 은우엄마가 떠올랐다.
평소에도 내가 어딘가에서 교육정보를 물어다 줘도 잘 떠먹지 않고 원체 움직이질 않던 은우엄마가 떠오르면서, 암만 그래도 영어유치원이 우리 동네에 생겼다는 소식에는 조금 솔깃해하지 않을까 싶어 문자 보냈다. 은우도 영어 잘해 안 좋을 건 없으니까.
"은우엄마, 우리 아파트 옆건물 토이마트 없어지고 생긴 게 영어유치원이래요. 다다음주 수요일에 설명회 한다는데 같이 갈래요?"
"아, 하준엄마. 저도 현수막 봤어요.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예상했던 대로지만 어쩐지 그날따라 오기가 생겼다. 이 여자는 뭐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애들 교육에 천하태평일까.
"그러지 말고 같이 가 봐요. 보니까 영유 출신 애들이랑 아닌 애들이 확실히 차이가 크대."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저희 애들은 아직 공부는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지금 유치원도 너무 잘 다니고 있어서......."
보통의 엄마라면 이쯤 되면 넘어오는데 은우의 엄마는 달랐다.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내 친구 아들이 은우랑 동갑이거든요? 작년부터 영어유치원 다니고 있는데, 걔는 벌써 영어동화책을 읽더라구요. 애들이 벌써부터 이렇게 차이가 나더라고. 영어유치원이라고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놀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거잖아요. 영어공부도 다 때가 있어서 어릴 때 해줘야 더 쉽대요. 나중에 커서 하려면 고생한대."
"아, 그런가요? 제가 잘 몰랐네요. 은우는 아직 알파벳도 모르긴 하는데, 일단 한글도 잘 몰라서 무리일 것 같아요. 항상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이번에도 실패였다. 이 미련하게 굳건한 여자는 도대체 나중에 애들을 어떻게 키우려고 이렇게 천하태평일까 싶었다.
이후의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그렇게 영어유치원 설명회를 다녀온 뒤 난 하준을 곧장 영어유치원으로 보냈다. 지금이 영어를 하기 제일 좋을 때라는데 , 엄마로서 안 보내는게 직무유기 아닌가. 일반 유치원의 2배가 넘는 학원비를 감당하기 쉽진 않았지만, 허리띠 졸라매면 굳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남편의 극구 반대도 있었지만, 우리의 노후보다야 아이의 미래가 우선이었다. 아니, 아이 잘 키우는 게 우리 최고의 노후니까.
하준은 3년 동안 영어유치원을 다니면서 정말 미국아이처럼 말하고 들었다. 돈이란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가, 싶게 돈맛을 톡톡히 보여줬다. 하준이와 둘이 길을 걸을 때는 부러 영어로 말하기도 했다. 내 짧은 영어로 하준의 긴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을 하며 걸어 다녔다. 그러면 원어민 뺨치는 하준의 발음을 듣고 길 걷던 사람들이 한 번씩 휙휙 돌아보거나 눈길을 주고는 했는데, 그 희열이 정말이지 말로는 표현 못할 것이었다. 멋모르는 남편은 부끄럽게 소리 좀 낮추라고 했지만, 정말 뭘 모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건데, 하준의 19년 평생 영어를 제일 잘하던 시절은 딱 그 3년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유치원 다닐 적보다 영어를 쓰지 않으니 영어실력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들인 돈이 얼만데, 눈앞에서 돈값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결국 고등학교 시험에서도 영어 때문에 애를 좀 먹었다. 하지만 내가 쓴 돈이 아깝고 창피해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던 속앓이였다.
하준은 어렸을 적 자기가 영어 스피킹을 하던 영상을 보고서 속도 없이 '나 영어 되게 잘했다'하고, 남편은 '그러게 내가 보내지 말랬지' 하는데 아주 쌍으로 내 속을 벅벅 긁는 날들이었다.
하준이 초등학교 입학 후 불시간에 사라진 영어실력으로 영어유치원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쯤, 하진이 유치원을 다녀야 될 시기가 찾아왔었다. 하준의 과거덕에 영어유치원에 다시는 돈을 갖다 바치지 않겠다 싶었는데, 하진의 친구 엄마로부터 영어유치원을 나오는 게 다가 아니라 졸업 후에도 영어유치원 연계학원을 다니면 영어실력을 쭉 유지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어느 정도 유지를 위한 작업을 해 주면, 정말로 아이의 머리에 영어가 콱 박혀서 그 이후에는 영어를 날아가지 않게 잘 붙들어 맬 수 있다는 거였다.
이야기 들어보니 정말이지 논리적인 것 같아 이번엔 실패하지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돈이 한 두 푼이 아닌데, 어쩌지, 남편을 어떻게 설득하나, 싶던 중 남편이 극찬해 마지않던 은우엄마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