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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글 Oct 18. 2024

너는 나, 나는 너

'까톡!'


 저녁식사 설거지와 청소를 한 뒤 샤워까지 마치고서, 이제 나도 좀 쉬자 소파에 앉아 SNS를 둘러보던 차였다. 이 시간에 무슨 카톡일까 싶어 메시지 눌러 어플을 열었더니, 난데없는 한 장의 사진이 다희엄마로부터 도착해 있었다.

 사진 속에서 초록과 하양이 섞인 젊은 애들 스타일의 재킷을 어벙벙하게 입고 뒤돌아 서 있는 다희 엄마는 고개만 살짝 비틀어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덩치 큰 다희엄마가 제 몸보다 큰 재킷을 입으니 더 뚱뚱해 보였다.

 "아까 카페에서 말한 거 기어코 다희가 사다준거 있지? 내가 용돈 아끼라고 했는데,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게 엄마 덕분이라나 뭐라나. 진짜 못 살아, 내가. 딸이 사준 거라 그런가, 샤넬 재킷보다 더 좋긴 하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를 사진과 메시지에 내 손가락은 일순 굳어버렸다. 하지만 말풍선 옆의 깨알 같은 숫자가 줄어들며 내가 메시지를 읽은 걸 눈치챘을 테니 반응을 아니할 수 없었다. 나름의 사회생활을 해야 했다. 영혼 없이 대충 기본 캐릭터 중 눈에 하트를 붙인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같은 채팅방에 있던 현우엄마 역시 일언반구 별다른 말 없이 엄지 척 이모티콘만 보내왔다.

 역시, 같은마음 이리라.

 

 별 시답잖은 우리의 반응에 흥미를 잃은 다희 엄마도 이후엔 별다른 회신이 없었다. 난 조용한 메신저방에서 다희 엄마가 보내 준 사진에 다시 눈을 돌려 그것을 꾹 누른 뒤 두 손가락으로 크기를 키워가며 좀 더 꼼꼼히 훑어보기로 했다.

 등 뒤에 영어로 된 대학이름과 학교 로고를 커다랗게 자수 새긴 그다지 고급스럽지는 않은 야구잠바였다. 저 옷을 입고 어딜 나돌아 다닌단 말인가, 몇 백짜리 샤넬재킷보다 더 좋을 리가 없다. 허풍은.

 클로즈업한 손가락을 옮기며 이번엔 다희 엄마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작게 보았을 땐 몰랐는데 크게 확대시켜 보니 얼굴이 뿌얘서 이목구비가 전혀 분별되지 않았다. 어플을 쓴 게 분명했다. 그럼 더 날씬하게 나왔어야 되는 건데, 사진 속 다희 엄마는 그다지 날씬해 보이지 않았다. 살 좀 빼야겠네, 다희엄마.


 "뭐야? 학교 과잠이야? 누구야?"

 언제 학원에서 돌아왔는지 교복 입은 채 그대로 소파 옆에 누운 듯 기대앉아 핸드폰을 주야장천 하고 있던 딸 하진이 내 핸드폰을 슬긋 보고서 말했다. 이때다 싶어 하진에게 핸드폰을 들이밀며 동의를 구했다.

 "이거 봐, 다희아줌만데. 어째 살이 예전보다 더 찐 거 같지 않아? 옷이 그래서 그런가. 안 그래도 한 덩치 하잖아, 다희아줌마."

 하진은 다희엄마의 몸에는 관심 없다는 듯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제 말만 했다.

 "오, 다희 언니 학교 과잠이구나. 간지 쩐다."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것도, 다희의 별 대단치 않은 학교를 올려 말하는 것도, 심지어 간지 쩐다는 그들의 최상급표현으로 표현하는 그 모든 게 다 괘씸해진 난 하진이 유심히 보고 있던 핸드폰을 확 낚아챘다.

 "아, 뭐야 엄마. 잘 보고 있는데."

 "간지 쩔긴 뭐가 쩔어. 야 니네 오빠는 연대야. 간지 쩌는 건 니 오빠 학교가 더 간지 쩔지. 그리고, 너! 너는 지금 남의 학교 옷을 보면서 멋있다 어쩌다 할 때야? 얼른 가서 공부나 해. 너 이번 모의고사 등급 더 떨어진 거 어떡할 거야. 내가 그러라고 너 학원 보내고 라이딩 해주고 있는 줄 알아? 성적이 그 모양이니까 저 정도 학교를 보고서도 간지가 어쩌네 저쩌네 하지. 너도 오빠만큼 해주니까 오빠만큼은 가야 될 거 아냐. 지금 핸드폰이 눈에 들어오니?"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 구박에 입 삐죽거리곤 시무룩해져 제 방에 들어가 공부하는 체라도 했던 하진이 오늘은 웬일인지 빠득빠득 반박하고 나섰다.

 "아 아까 저녁부터 너무하네. 다른 말은 다 참아도 오빠만큼 해주니까 오빠만큼 해야 된다는 말은 못 참겠다 진짜. 엄마가 언제 오빠만큼 해줬어? 오빠 다녔던 학원 반만큼도 안 가고 있는데 무슨. 오빠는 고1 때부터 과외도 붙여줬잖아! 그리고, 아까 저녁때도 내가 소고기 못 본 줄 알아? 오빠 저녁 안 먹는다니까 냉장고에 다시 넣었지? 적어도 먹는 것 가지고는 그러지 말자 진짜!"

 이 요망진 계집애가 머리만 커져서는 드디어 엄마한테 대들기 시작하는구나 싶어 혈압이 솟구치는 듯했다. 하지만 소고기를 봤다는 말에서 기세가 조금 꺾였는데, 그 틈을 눈치챈 얍삽 빠른 하진이 내 반격은 듣지도 않고 제 방으로 쌩 가버렸다. 야! 김하진! 뒤늦게 소리쳐 불러봤자 소용 없었다. 더 받아칠 수 있었는데. 분하다.



 '띠띠띠-'

 아직 하진이 던지고 간 사악한 말들 때문에 분을 채 삭이기도 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2시간 전에 금방 온다고 했던 아들 하준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금방 온다더니. 저녁은 먹었어?"

 대학 합격생을 보자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은 스르르 눅었다. 그냥 대학 합격생이 아닌 sky 대학생인 내 아들.

 "어,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애들이랑 얘기 조금 한다는 게 길어졌네. 아빠는요?"

 무언들 어떠랴, 대학 합격한 날인데. 내가 이렇게 신이 나는데 저는 얼마나 기분 좋을까 싶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아빠는 뭐 안방에 있겠지, 대충 대답하고선 자랑스러운 연대생 아들을 보고 있다가 불현듯 오후에 엄마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맞다, 하준아. 너 엄마가 보낸 문자 봤지? 오티 언제 하는지 알아봤어?"

 하준은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또 나왔네, 이 동태눈깔. 도대체가 내가 안 챙기면 자기 것을 잘 챙기지도 못하는 이 아이란 몸만 19살이지 갓난아기랑 다름없다. 아휴, 내가 챙겨줘야지.

 "엄마가 문자 보냈잖아. 오티 때 시간표 짜고 이런 중요한 이야기들 한대. 그때 잘 들어놔야 된다더라구. 넌 엄마가 다 챙겨줘야 되니? 엄마가 내일 오전에 학교에 전화해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하준이 대답했다.

 "아 별 거 없대. 어차피 지금 하는 건 그냥 얼굴 익히는 정도로 모이는 거고, 실질적인 전체 오티는 입학 전에 문자 주고 한대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순식간이었다. 제 앞가림 못 해서 조금 챙겨주려 했더니 마치 날 간섭쟁이 엄마로 몰아가고 있었다. 억울하다. 자기가 지금 학교에 입학한 게 누구 덕인데, 내가 하나하나 챙겨주지 않았다면 대학 문턱도 못 넘었을 것이면서. 이제 대학생이란 건가, 난 4년제도 나오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건가. 아무렴 내가 너만큼 지원받았으면 서울대는 그냥 가고도 남았다. 하지만 울컥 차오르는 나를 그대로 남겨둔 채 하준은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엔 그 뒷통수에 소리 질러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믿는 도끼, 아니 믿는 동태한테 발등 찍힌 나는 멍해진 채 억울함과 서러운 마음을 달래보고자 소파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아까 보다 만 다희 엄마의 사진이 떴다. 안 그래도 나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다희는 엄마 준다고 과잠이니 뭐니도 사주고, 이렇게 자랑까지 하는데. 나는 이제 지 일은 지가 알아서 하겠다고 이때까지의 내 수고를 알아주지도 않는 동태아들의 괘씸한 말만 듣고 있어야 한다니. 역시 딸을 낳았어야 했다. 아니, 공부 잘하는 딸을 낳았어야 했다.

 그러다 다희 엄마가 입고 있는 잠바에 다시 눈이 갔다. 보다 보니 과연 샤넬 재킷보다 더 좋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샤넬이야 돈만 내면 살 수 있고, 돈이 없다면 돈을 빌려서라도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대학교 잠바란 사채 빚을 진다손 치더라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샤넬처럼 너무 천박하게 부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소속된 하이클래스의 세계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뽐낼 수 있는 정말 좋은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갖고 싶다, 나도 하준의 학교 잠바를 입고 싶다. 하준에게 과잠을 사달라고 대놓고 빌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쩌나.


 

 "저녁을 일찍 먹어서 그런가, 출출하네."

 금세 옷을 갈아입고 배를 쓰다듬으며 방을 나서는 하준은, 나를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자신의 배고픔을 어필했다.

 "라면 하나 끓여줘?"

 이제 곧 자러 가려던 참이었지만, 과잠 얘기를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아까의 속상했던 마음을 숨긴 채 자애로운 엄마가 되어 물었다.

 "네! 진매에 계란 넣어서~"

 가지가지한다 싶지만, 나에겐 아직 과잠이 있으니 꾹 참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오래된 가스레인지라 그런지 불이 잘 붙지 않아 틱틱 여러 번 시끄럽게 돌려서야 화구에 불이 붙었다. 요즘은 다 인덕션 쓴다는데, 이 참에 우리집도 바꿔야 되나.

 "어? 라면 끓여? 나도 나도!"

 소란한 가스불 켜는 소리에 귀신같이 방에서 튀어나온 딸 하진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부쩍 살이 붙는 중에 밤에 라면까지 먹으면 앞으로 어쩔 거냔 소리가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러기엔 이미 내 에너지가 많이 소진된 저녁이라 꾹 참고 그냥 말없이 냄비에 1인분 양의 물을 더했다.

 

 티 많이 나지 않게 아들의 그릇에 라면의 양을 좀 더 담아내며 이 귀찮은 식모생활 언제 졸업하나, 싶었지만 또 후룩후룩 별거 없는 라면을 잘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이게 내 삶의 이유기도 하지 싶었다.

 "엄마가 라면 물을 진짜 잘 맞춘다니까. 내가 혼자 끓이면 이 맛이 안 나서."

 너스레를 떠는 아들 하준을 보자니 또 마음이 뭉근해지는 것이었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 슬쩍 속얘기를 내비쳤다.

 "너희 학교도 과잠 같은 거, 있지?"

 "과잠? 아 과 잠바? 어, 아마 있겠지? 왜요?"

 왜긴 왜야, 이 정도 말 했으면 센스 있는 딸이었다면 눈치껏 엄마도 하나 사드릴까요 했을 텐데. 눈치 없는 아들 낳은 내 잘못이지 싶어 좀 더 노골적으로 속내를 말했다.

 "아니, 다희 엄마가 오늘 다희한테 학교 과잠을 선물 받았는데 너무 이쁘더라고."

 "다희가 다희엄마한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희 학교 과잠인데 왜 다희 엄마가 입어? 다희 엄마도 이대 나왔어요?"

 눈치를 콧구멍으로 먹은 건지 귓구멍으로 먹은 건지, 도대체 먹을 수 있는 건 라면뿐인 건지 모를 아들에게 어디부터 가르쳐줘야 되나 고민하는데, 옆에서 얌전히 라면을 먹고 있던 통통이 딸 하진이 말했다.

 "오빠 진짜 눈치 없네. 엄마는 그냥 연대 잠바 입고 내 아들 연대 다닌다고 자랑하고 싶은 거잖아. 다희아줌마가 다희언니네 학교 옷 입은 거 부러우니까."

 내가 하려던 말보다 다소 노골적인 하진의 말이었지만 대충 골자는 맞다 싶어 별다른 대꾸 하지 않던 중, 하준이 대답했다.

 "아니, 학교 사람이 아닌데 왜 학교 잠바를 입어. 내가 연대지, 엄마가 연대가 아니잖아. 학교 사람이 아닌데 학교 잠바를 입어도 되나? 내가 연대 다니는걸 굳이 자랑하고 싶은 거야? 옷 입고? 아니지, 엄마? 하진이가 오버하는 거지?"

 정말이지 괘씸한 놈. 이 녀석은 벌써 나와 저를 분리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모진말을 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지가 연대를 간 건 8할이 내 덕인데, 자기만의 공인 양 구는 눈앞의 아들이 너무나 괘씸했다. 그깟 잠바 하나 얻어입자고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되나 싶어 화가 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때까지의 내 노력이 모두 부질없는 것 같은 기분, 부정당한 느낌. 엄마 없인 못 살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내 챙김을 후루룩 받아먹기만 할 땐 언제고.

 하지만 '설마, 엄마가 그럴 리가 있나요'라고 묻는, 그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된 냥 말하는 아들 앞에서 그래 그게 내 마음이다 외칠 수는 없었다. 목에 걸린 수백 개의 말을 꿀꺽 삼켰다.


 말없이 식탁에서 일어나는 뒤통수 너머로 딸 하진이 제 오빠에게 무어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군거리는 저들을 위해 헌신하며 바쳐온 20년 가까이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슬프게 지나갔다.

 집안 가득 퍼져있는 매콤한 라면냄새에 괜스레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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