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겸손을 떨다 은밀한 자랑을 내비쳤다 상대를 슬쩍 까내리기도 하는 다소 감정이 소모되는 대화를 하면서도 또 그 재미에 시간이 훌쩍 지난 줄도 모를 무렵, 누군가의 핸드폰 진동으로 턱을 괴고 있던 테이블의 상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내 것인가 싶어 팔꿈치 밑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내려보았지만, 새까맣고 조용한 화면에 턱살 그득한 내 얼굴이 비쳐 화들짝 놀라기만 했다. 고개 들어 앞을 쳐다보니 다희엄마가 배시시 웃으며 검지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 위아래를 조정하고 있었다.
"아, 우리 다희~"
우리의 시선을 느낀 다희엄마는 아무도 묻지 않은 말에 대답했다. 다시 우리의 대화로 돌아오라는 신호로 별 대꾸 없이 현우 엄마와 눈빛만을 주고받았지만, 다희엄마는 눈치를 챈 건지 못 챈 건지, 아니 못 챈 척하는 건지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엄지와 검지로 화면 속 무언가를 늘렸다 줄였다 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다희 오늘 대학교 오티 갔잖아~. 요즘은 학교 안에 굿즈샵 뭐 그런 게 있나 봐. 내가 저번에 젊은 애들 학교 잠바 입고 다니는 거 너무 이쁘다고 했더니 내 거 사주겠다고 모델 몇 개를 사진으로 보냈네? 예전에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는데, 그걸 또 어떻게 기억을 했대. 이것 봐봐, 요즘 애들 옷은 디자인도 어떻게 이렇게 세련됐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불나불 털어대는 다희엄마의 얘기에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았다. 난 다시 시가 욕 하던 이전의 대화주제로 돌아가고 싶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다희엄마가 이제 시어머니랑 드디어 연을 끊을건지 말건지 중대한 이야기를 하던 차였단 말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되겠지란 생각에 커피는 진작에 다 마신 컵 속의 커피 향만 미세하게 남은 커피도 아닌 얼음물도 아닌 그 무언가를 빨대로 빨아들이는데, 참을성 없는 현우엄마가 다희엄마에게 대답했다. 그것도 다희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어머, 다희엄마는 좋겠다. 역시 딸이라서 엄마 생각하는 게 다르네. 우리 현우도 그저께 오티 다녀왔는데 그런 말 한마디 없던데. 이럴 때 역시 딸 낳았어야 했나 싶다니까."
"무슨, 현우도 남자애치고는 다정하잖아. 아니면 아직 안 늦었으니까 현우엄마도 딸 하나 노려봐~."
꺄르르륵.
10년이 넘도록 똑같은 레퍼토리에 억지웃음이라도 지으려는 내 입가가 경직되다 못해 살짝 떨려왔다. 아들이 무려 19살인데 둘째를 노려보라는 마음에도 없는 현실 불가능의 말을 하는 다희엄마나, 사실은 딸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나와 둘만 있으면 속마음 얘기했던 현우엄마나 서로 속 없긴 마찬가지인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문득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시간에 얼른 시가 얘기로 돌아가자고.
내 무심한 표정을 읽었는지 어쨌는지, 현우엄마가 문득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서는 짐짓 놀란 체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주에 애들 다 오티 가던데 추가합격하는 애들은 어떻게 하는 거지? 걔네는 오티 못 하는 건가? 오티 때 막 중요한 얘기들 해주지 않나? 하준이는 뭐래?"
갑자기 오른쪽 뒷골부터 정수리까지 피가 쭉 솓구치는 느낌이었다. 내 아들 오티는 어쩌는 거지. 합격발표가 늦은 아이들은 오티 참석도 못 하는 건가. 오티 때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러게, 하준이한테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나는 무심하고도 대수롭지 않은 척 대충 대답하고선 슬며시 팔꿈치 밑의 핸드폰을 들고 하준에게 보낼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아들, 학교 오티는 언제 하는지 알아봤어? 다희랑 현우는 이번 주에 다 했대. 그때 중요한 얘기들 한다니까 얼른 알아봐. 알아볼 데 없으면 엄마가 학교에 전화해 볼 테니까 필요하면 말하고.'
타이핑하면서도 내가 바로 학교에 전화해 보면 되겠다 싶었지만 문득 지난달 비슷한 문제로 하준과 다툰 기억이 있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제 생각해서 이것저것 알아봐 주는 게 자기를 못 믿는 것 같다나, 알아서 하겠다나, 머리 굵어진 소리를 해대서 그럼 너 알아서 하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메시지의 말미에 썼던 '엄마가 학교에 전화해 볼 테니까'의 문구는 지우고 최종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렇더라니까. 잘해줘 봐야 결국에는 못한 것만 기억하시는 양반들이라고. 애초에 잘해드릴 필요가 없어. 뭐 트집 잡을 거 없나,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기분이라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니 현우 아빠 요즘 얼마나 살이 올랐는데, 저번 설 때는 현우아빠 얼굴을 딱 보더니, 요즘 밥 못 얻어먹고 다니냐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냐 아주 나 들으라는 듯이 목청 높여서 말씀하시더라고. 이제 나이가 벌써 50줄인 아들을 아직도 신생아처럼 챙기고 앉았잖아. 뭘 얼굴이 상했냐 마냐야. 번드르르한 게 아주 나보다 피부가 좋은데."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다희아빠한테 딱 말한 거잖아. 나도 이제 나이도 있고, 애도 다 컸으니까 더 이상은 시댁 잔소리 들으면서 못 산다. 이제 시댁 갈 때 당신 혼자 가던지, 아니면 어머님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못을 박던지, 알아서 하라고."
"어머, 다희엄마 너무 멋지다. 그래, 결국 남편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건데 왜 애먼 며느리들이 남의 집 가서 허드렛일 하고 잘해도 욕을 들어 먹고 자기 아들 시중 노릇을 해야 하느냔 말이야. 우리가 뭐 자기 아들들 뺏어왔어? 어우 말하고도 징그럽다 야. 뭐 얼마나 정성들여 키웠길래 그런대. 하준엄마, 우리는 그러지 말자. 아들교육도 잘 시키자."
"그래, 우린 그런 시어머니 되지 말자."
시가 이야기로 다시 하나가 된 우리는 서로 아들교육을 잘 시키고, 전형적 시어머니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헤어졌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지만 언제나 재밌는 소재다.
얼기설기 엮인 듯 만 듯, 서로를 위하는 듯 아닌 듯, 견제하고 눈치 보며 누가누가 잘났나를 얼마나 티나지 않게 하는지 신경전하는 다른 대화주제들과는 다르게, 시가의 이야기는 누가누가 불행한가 그래 다 똑같네 이야기하며 우리를 찰떡같이 하나로 척 붙여주는 기분이었다.
저녁 준비를 위해 다섯 시 경 분주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도 대충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하루 삼시 세끼 식사 상 차리는 게 세상 고역인지라 오늘은 또 어떤 요리를 해야 되나, 얼마 가지고 있지 않은 레시피 안에서 최근에 만들었던 요리와 자재값이 부담스러운 재료들은 빼고 남는 선택지들로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 보면 장보기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만든 식단을 몇 숟갈 먹지 않는 가족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그게 내 일이기에 손과 다리를 분주히 움직였다.
오늘은 그래도 하준이 대학에 합격한 특별한 날이니까 큰 맘먹고 아들 하준이 좋아하는 소고기를 샀다. 고기는 굽기만 하면 되어 다른 요리보다 손이 적게 가 요리시간에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국물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들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절대 어겨선 안 되는 중대사안처럼 살아온 20년이었기에, 진심 어린 마음은 담아내지 못하더라도 손은 언제나 남편 먹일 찌개나 국을 제일 먼저 끓이고 있었다.
검지손가락만 한 통통한 멸치를 프라이팬에 한 번 덖어 비린내를 잡아준 뒤 쌀뜨물 끓인 물에 담가 멸치육수를 낸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멸치 국물 냄새가 주방 가득 솔솔 올라오면 멸치 두어 개만 남겨둔 뒤 모두 빼내고 엄마들과 공구한 경남 합천 어딘가에서 만든 재래된장을 한 스푼 푹 떠 넣는다. 둥그런 된장을 덩어리 지지 않게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으깨 흩트린다. 가격이 미쳐버린 애호박이지만 애호박 없는 찌개는 찌개가 아니라는 남편의 뭐 같은 고집에 맞춰주고자 애호박과 두부도 송송 썰어 넣고, 미리 으깨놓은 마늘은 맛이 나지 않아 통마늘 두 개 그 자리에서 칼로 다져 퐁당 집어넣은 뒤 버섯, 양파, 파까지 넣고 푹 끓이면 온 집안에 된장찌개 냄새가 폴폴 난다. 향긋한 그 냄새에 요리하는 내 배에서도 꼬르륵 신호를 보내온다.
미리 만들어둔 나물 반찬 두어 개와 고기와 같이 먹을 장아찌, 쌈채소를 상에 미리 차려두고 밥과 찌개는 따뜻하게 내고자 그릇만 꺼내두었다. 비싼 소고기 역시 따뜻하게 먹이고자 가족들 식탁에 둘러 앉으면 바로구워낼 심산으로 가족들을 기다리던 중,
띠띠띠띠-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현관 쪽으로 고개 돌려보았더니, 뭐가 그리 급한지 헐레벌떡 신발 멋대로 던져 벗고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그 짧은 사이에 가방이며 후드티를 한 꺼풀씩 벗어 내동댕이 치고 달려 식탁에 냅다 앉은 이는, 딸 하진이었다.
"아 배고파 배고파! 엄마, 얼른 밥, 밥."
"조금만 기다려, 조금 있으면 아빠랑 오빠 올 거야. 옷이 저게 뭐니, 얼른 방에 갖다 놔."
"아, 빨리 밥. 8시에 수학 가야 된단 말이야."
"시간 있잖아, 기다려. 넌 오빠랑 다르게 밥도 얌전하게 못 먹어서 너 하나 먹이고 나면 식탁 새로 싹 다시 차려야 된단 말이야. 손이나 씻고 옷 정리해."
갓 고등학생이 된 딸 하진은 나의 핀잔에 눈을 흘겼지만 없는 말 한 건 아니니 군말 없이 화장실로 팽 들어갔다. 단정하고 얌전한 아들 하준과는 다르게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딸 하진이는, 덜렁대고 부산하지만 그래도 털털하니 뒤끝은 없는 성격이라 하준을 대할때 보다 편한게 사실이었다. 어째 아들이랑 딸 성격이 바뀐 것 같다니까.
띠띠띠띠-
다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온 건, 남편이었다.
"된장찌개 했나 봐? 집 밖에서부터 냄새가 진동이네."
칭찬인지 욕인지 먹고 싶다는 건지 별로라는 건지 당최 알 길 없는 뭉둥한 남편의 저 말투는 날 언제나 화나게 한다. 국물 없이 진짜 밥 못 먹나, 다음에 물만 차려 내리라, 속으로 이를 갈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들, 오는 중이야? 저녁때 다 됐는데 언제 올 거야?'
어떤 캐릭터 이모티콘을 날릴까, 곰돌이가 좋을까, 오리가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하준에게서 회신이 왔다.
'엄마, 오늘 친구들이랑 저녁만 먹고 들어갈게요.'
순간 이마 끝부분이 찌릿하며 열이 오르는 듯했지만, 화를 눌러 삼키며 문자에 회신했다. 나는 그런 시어머니가 되지 않을 거니까, 나는 아들교육 잘 한 멋진 엄마니까.
'알겠어, 시간 맞춰 조심히 들어와.'
내 문자에 아들은 하트를 뿅뿅 쏘아대는 사자 이모티콘으로 회신했다.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난 아들 잘 키운 엄마다.
휴대폰 놓고 부엌으로 돌아오니 남편과 딸 하진이 이미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쌈채소를 이리저리 뜯어먹고 있었다. 밥을 푸고, 찌개를 그릇에 담아 낸 뒤 프라이팬을 꺼냈다. 기름을 두르고 계란 세 개를 탁탁 깨어 떨어트려 넣고, 계란이 익을 동안 꺼내놓았던 소고기는 냉장고에 슬며시 넣어두었다.
계란 세 개를 접시에 담아내어 가자니 하진이 의문스럽다는 듯 말했다.
"뭐야, 쌈채소 있어서 고기 먹는 줄 알았더니, 웬 계란프라이?"
눈치 빠른 것. 괜히 뜨끔해서 더 크게 핀잔투로 대답했다.
"너 요즘 운동 안 해서 살 많이 쪘잖아! 아직 고1 밖에 안 됐으면서 왜 이렇게 안 움직이는 거야. 대학교 들어가면 자연히 살 빠진다는 말, 다 거짓말이야. 너 그거 믿고 있는 거 아니지? 채소 많이 먹으라고 애써서 사논 거니까 먹어. 채소는 뭐 고기 먹을 때만 먹을 거야?"
계란 한마디에 잔소리 백 마디를 받았다는 표정의 하진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이미 말은 쏟아진 뒤인걸 어쩌랴. 남편은 미간을 찌푸린 채 된장찌개를 들이마셨고, 하진은 풀떼기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맨 밥만 꾸역꾸역 먹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오늘의 주인공인 하준이 없는 자리에서 큰 맘먹고 산 소고기를 꺼낼 순 없잖은가. 한 끼만 그냥 넘기자. 오르지 않는 니 아빠의 월급을 탓하렴.
그래도 어미인지라 모진 말 한 게 미안해 나 역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소고기 한 덩이만 꺼내 구워낼까 어쩔까 고민하던 중, 앞치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엄마, 저 저녁 간단히 먹고 이제 집 가는 버스 탔어요. 한 시간 정도 걸릴 듯요.'
미소 지으며 핸드폰을 닫고서 하진의 새하얀 쌀밥 위에 잘 익은 계란프라이 한 점 떼어 살포시 얹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