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융글 Nov 01. 2024

뿌리 얕은 나무(2)

 자기가 벌어온 돈이란 건가, 애들 교육비에 유난히 예민하게 굴어대던 남편은 별다른 사교육비를 들이지 않는 은우엄마의 자녀교육을 찬양하다시피 했다. 아들 하준의 영어유치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도, 남편은 은우엄마의 행태를 살폈었다. 


 "그러니까, 하준이 영어유치원 다닐 거야. 프로그램이 너무 좋더라구."

 "원비가 너무 비싸지 않나?"

 "정말, 그놈의 돈, 돈. 우리가 애가 많아봐야 둘 뿐인데 계속 이럴 거야? 애들이 영어를 어디서 배울 거야? 다 커서 학원 가서 배우면 우리 지금 영어 하는 수준밖에 더 돼? 아니면, 당신 어디 다른 아빠들처럼 주재원이라도 갈 수 있어? 몇 년씩 해외 나갈 수 있냐고, 아니잖아.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면 이거라도 줘야지. 하준이 어린이집 친구들도 다 갈 거래."

"... 은우엄마는?"


 그놈의 은우엄마, 은우엄마. 

 정말이지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머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교육비는 '소비'가 아니라 '투자'인 것을. 

 하긴, 남들 다 돈 버는 주식 한 번 손대지 않고, 집 한 채 사는 것도 벌벌벌 떨면서 예적금만 믿는 남편한테 '투자'를 기대하긴 뭘 기대한단 말인가.

  하지만 하준의 영어유치원 결과가 실패로 나온 이상 딸 하진의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해서는 은우엄마가 필요했다. 



 카페에서 만난 은우엄마는 에코백을 한 짐 짊어지고 나타났다. 뭐냐고 물으니 도서관에 반납할 자기 책과 아이들 책이라고 했다. 남편은 날더러 극성이라 그랬지만 내 눈엔 저렇게 한 보따리 메고 다니는 은우엄마가 더 극성인 것 같았다.

 각자 커피를 시키면서 은우엄마는 그 뚱뚱한 에코백을 뒤져 검은색 촌스러운 텀블러를 하나 꺼내 종업원에게 내밀었다. 혼자만 깨쳐있는 소시민인 척하는 은우엄마의 가증스러움에 역시 나랑은 맞지 않네, 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내가 아쉬운 입장이니, 모든 것들을 가볍게 눈감아 넘기기로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남편들의 안부를 스치듯 물은 뒤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은우는 요즘 학교생활 어때요?"

 "다행히 잘 다니고 있어요. 재밌나 봐요. 친구들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하준이도 잘 다니죠?"

 그 무렵, 아들 하준이 아침마다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통에 집안은 항상 전쟁통이었다. 피곤하다나 어쨌다나. 초등학생 되면서 예체능 학원에서 수학학원과 영어학원을 더했더니 학원이 많다고 어찌나 징징대던지. 피곤해서 학교를 갈 수 없다고 엄살을 피우던 날들에 진절머리가 나던 때였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은우엄마한테 말할 순 없었다.

 "네, 하준이도 잘 다니죠. 은우랑 같은 반 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호호, 떠다니는 말들을 조금 더 하다 다시 방향을 잡고 말했다.

 "학교 들어가니까, 영유 나온 애들이랑 안 나온 애들이랑 패가 갈린대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영유 나온 애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니까."

 사실 하준이 학교에서 같은 영어유치원 친구가 몇 명 있다고 해준 말을 조금 부풀려 말했다. 뭐, 없는 사실은 아닐 거 같으니까. 은우엄마는 예의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하지만 알맹어 없이 답했다.

 "그런가요. 아무래도 애들이 익숙한 친구들을 좋아하나 봐요."

 가방에 책을 잔뜩 담아 다니는 양반이 문해력은 영 꽝인가 싶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몇 가지 필살기를 더 꺼내 들었다. 

 하준이가 영어 제일 잘할 때 영어 연설 대회에 나갔던 영상, 대입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율을 정리한 도표, 오로지 영어 실력만을 이용해서 갈 수 있는 대학 리스트, 영어유치원 출신 유명 아이돌이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영상 등 핸드폰 꺼내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사진을 늘리고 볼륨을 높여가며 마치 영어유치원 판촉사원이 된 것처럼 은우엄마를 설득했다. 


 하지만 은우 엄마는 와, 라던지 대단하다, 라던지의 영혼 없는 감탄사만 흘릴 뿐이었다. 답답해진 나머지 본론을 꺼냈다.

 "은우는 안 갔다 쳐도, 은아는 영어유치원 보내보는 게 어때요? 가끔 우리 하진이랑 노는 거 보면 은아가 언어에 관심도 많고 실력이 있는 것 같던데. 은우엄마가 잘한 게, 사실 영어 유치원이 남자애들한테는 잘 안 맞는 거 같긴 해. 인풋 대비 아웃풋이 잘 안나오더라구요. 아무래도 여자애들이 언어능력도 뛰어나고 빠르고 그러니까, 딱 은아 같은 애가 영어유치원 들어가면 아웃풋이 장난 아닐걸?"

 이달의 영업왕 못지않은 나의 영어유치원 판매이야기에도 생글싱글 웃기만 하던 은우 엄마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은우엄마의 표정 변화는 좋은 신호인가, 나쁜 신호인가 싶어 그 의미를 해석하려던 중, 은우엄마가 입을 한 번 앙 다물고 촌스러운 텀블러 속의 커피로 목을 축이고서 입을 뗐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바라보는 교육관은 다르지만, 하준어머님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했는데요. 솔직히 저에게 얘기해 주시는 아이들 교육과 관련된 부분들이 저에게는 편하지가 않아요. 그래도 웬만해서는 그래 그럴수도 있구나, 싶지만 방금 말씀 주신 인풋과 아웃풋이라는 단어는 저한테 있어 너무 공격적으로 들리는 단어네요. 한 사람의, 한 아이의 인격을 마치 기계처럼 다루는 듯해서 많이 불편해요. 제가 이런 말씀 안 드리는데, 이번엔 너무 불편해서."

  말을 저렇게 잘하는 양반이었나, 싶게 꾹 다문 입을 떼고서 말을 쏟아내는 은우엄마를 앞에 두고 기가 차서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어째서, 그 말이 어떻길래 저렇게 누군가 숨어있는 버튼을 누른 것처럼 푱 튀어올라 바르르 달려드는가 말이다. 영어유치원 엄마들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쓰는 단어였다. 아니, 돈이 들어가는데 그만큼 성과가 있어야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걸 세련되게 인풋 대비 아웃풋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 사건 이후로 은우엄마와 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멀쩡한 사람을 속물로 만들고, 줏대 없는 사람으로 만든 그 여자와 더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한테도 딱 잘라 말했다. 

 "내 앞에서 그 여자 편들지 마, 아니 그 여자 얘기 다시는 하지 마."



 

 "우리, 이사 가자."

 나의 선언에 남편의 눈이 똥그래졌다. 뭘 그렇게 놀라나.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 여기 초등학교까지는 괜찮은데 다닐만한 중학교가 없잖아."

 남편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중학교가 왜 없어. 초등학교 옆에 중, 고등학교 나란히 있잖아. 우리 애들 여기서 초, 중, 고 쭉 보내자고 대출받아서 이 집 산 거 아니었어? 나만 기억하는 거야? 아직 대출금이 한참 남았어."

 평소답지 않게 흥분하는 남편에게 대꾸했다.

 "내가 언제 중학교가 없다고 했어? '다닐만한'중학교가 없다고 했지? 정신 차려, 중학교가 다 똑같은 중학교인 줄 알아? 당신 여기 중학교 학업성취도 찾아본 적 있어? 특목고 간 인원이 작년에 0이야, 0. 그런 곳에 하준이를 보내고 싶어?"

 남편은 기가 차다는 듯 날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기죽을 쏘냐, 계속 말했다.

 "여기 있는 학원들도 그래. 초등 저학년 때까지 다닐 학원밖에 없단 말이야. 순 예체능 학원들에, 영어 수학도 대형학원은 하나도 없어. 어디 선행이나 심화를 시키고 싶어도 학원이 없으니 할 수 있냐구. 신도시가 이게 안 좋아. 집이 낡아빠져도 학군지에 가는 이유가 있지. 그렇게 학군지 애들이랑 아닌 지역 애들이 벌어지는 거야."

 "심화? 선행? 당신 하준이 영어유치원 그렇게 무리해서 보내놓고 지금 영어라면 학을 떼는 하준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대형학원은 또 뭐야? 그리고, 대형학원을 다닌다고 애가 대형이 되냐?"

 기어코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하는 남편이 정말이지 한심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애들 교육은 나 몰라라 방관하면서 올바른 정보를 먹여줘도 발로 걷어차는 형국이라니. 

 "알지도 못하면서 빈정대지 마. 당신이 애들 숙제를 한 번 봐준 적이 있어, 공부를 한 번 가르쳐준 적이 있어? 당신은 애들이 당신처럼 컸으면 좋겠어? 그렇게 만년 차장으로, 자기 회사도 아닌 대기업 로고 지질하게 박은 대기업 하청업체나 다니면서?"

 "말 조심해."

 말을 뱉으면서도 뭔가 잘못 됐다는 걸 알았지만, 한 번 연 입은 멈추질 않았다. 나 역시 억울하고 분통했다.

 "조심하기 뭘 조심해. 당신이 그랬지? 당신 어렸을 때는 엄마가 장사하느라 집을 비워서 우리 애들은 엄마 있는 집에서 자랐으면 좋겠다고. 그랬어, 안 그랬어? 교묘하게 모성애 자극해서 나 집에 들어앉힌 게 누군데! 그때 내가 뭐랬어, 그럼 내가 애 키우는 대신 교육관에는 터치하지 않았음 좋겠다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그때 당신 알겠다고 대답 했어, 안 했어! 어? 했어, 안했어! 조심하긴 뭘 말 조심해!"

 속엣말을 필터 없이 뱉어내고 나니 울분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웅웅 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조차 없었다. 남편의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자 꺼냈던 말이 내 머릿속에 다시 되새겨지면서 과거의 장면들이 지나갔고, 그 말들은 다시 나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몇 년간 가슴에 품고 있었던 내 마음이 이런 것이었나, 싶어지고 동시에 세상 모든게 서럽게 느껴졌다.

 


 그 후 6개월 뒤, 우리는 학군지로 이사를 했고, 지금도 남편 월급의 1/3이 대출금으로 나가고 있다. 

 덕분에 노후자금을 한 푼 모아두지 못했지만, 우리에겐 학군지의 자가가 있고, 연대 공대생 아들이 있고, 엄마 아빠 비행기 태워준다는 딸이 있다. 

 그것이 투자라고 생각했다.

  


이전 05화 뿌리 얕은 나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