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일정이 빼곡했던 날, 이 날따라 딸과의 일정이 겹치면서, 나는 딸에게 차를 양보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버스를 타고 아트 스튜디오로 향해야 했다. 차를 이용하면 금세 도착할 길이었지만, 버스로는 그 시간이 3배에서 4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운전석이 아닌 버스의 창가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새로운 길을 따라 느리게 이동하는 이 여정은 예상 밖의 선물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경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마음가짐이 피어났고, 마치 내가 몰랐던 시선을 새롭게 받아들이라는 우주의 초대 같았다.
버스는 큰길을 벗어나 주택가 골목을 고불고불 돌아갔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동네 풍경들은 내가 매일 지나다니며 지나쳐왔던 소소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안에 숨겨진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채 내가 보지 못했던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며 환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익숙한 것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이 경험은, 삶 속에서 놓치고 있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새롭게 찾은 마음을 가슴에 안고 아트 수업에 들어갔다.
이날은 교수가 수업의 흐름만을 짧게 2-3분 정도 설명하고 바로 드로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특별한 새로운 주제 없이 이전에 배운 것을 각자 연습하고 훈련하는 시간이었다. 교수가 제공해 준 여러 그림 중에서 다른 그림을 골라, 지난번 배운 기법을 떠올리며 나만의 방식으로 연습을 해나갔다. 하지만 이 시간이 단순한 연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은 나만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내 손끝에서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지, 여러 방식으로 시도하며 원하는 표현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나를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색다른 길로 스튜디오에 온 덕분인지, 이날 수업도 새롭게 다가왔다. 이 조용한 시간, 나와 그림 둘만이 남은 시간이 깊어질수록 목탄의 흔적들은 종이 위에 겹겹이 쌓여갔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의 사유와 감정들이 함께 켜켜이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그려진 선과 형태들은 내 안에 고요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닮아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 이게 내 그림이구나.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사진을 보고 그렸지만, 남들이 보면 특별할 것 없는 그림 같겠지만, 그것은 어느새 나만의 해석과 나만의 방식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이었고, 그 모든 순간이 오롯이 나에게 맞춰진 그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내 그림 속에 내가 있다는 것,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 그림에는 나의 생각과 나의 세계가 담겨 있었고, 그 안에서 진정으로 나 자신을 만나고 있었다. 이 경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만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가 나를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내 자리를 찾는 여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