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브런치북의 소개글 첫 문장은
"자신을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해 온 한 예술가의 긴 시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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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중과 예고를 시작으로 오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려왔지만, 나는 나 자신을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여겨왔다. 남들은 늘 내 그림을 칭찬했지만, 내 시선은 언제나 비판적이었다. 그저 그림을 즐기고 싶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고 억누르며, 손끝에서 그려낸 흔적조차 무색하게 느끼곤 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 호주에서 12주간의 아트 수업을 들으며, 나는 그동안 나를 가둬왔던 벽을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 과정을 통해 내 안에 잠재해 있던 깊은 생각들을 꺼내어 브런치에 기록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내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깨달음이다.
"나는 뭐든지 잘 그리는 사람이구나."
이제는 기꺼이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진실은 내가 원래부터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잘'이라는 것이 더 이상 남들이 보기에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나에게 있어 '잘 그린다'는 것은, 모든 그림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려내고 그 과정에서 나를 담아내는 것이다. 어떠한 재료든, 어떠한 기법이든, 어떤 장르가 주어지든,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나만의 그림을 탄생시키는 사람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어느덧 '나의 그림'이 되어 내 안에 쌓여가고 있다.
한동안 나는 내 그림 속에 나만의 스타일이 없다며 고민했다. 매일 하나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왜 나는 수채화를 그리면서도 유화의 매력에 끌리고, 색연필 그림을 하다가도 판화나 목탄의 터치에 매료되는 걸까. 왜 나는 한 가지 길로만 가지 않고 자꾸 여러 가지를 시도하려 하는 걸까.
그러나 이제는 이해한다. 나는 무엇을 하든, 어떤 도구로든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는 단순히 모든 것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만심이 아니라, 그 어떤 장르를 접하든 나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나의 모든 표현 속에는 나 자신이 함께 숨 쉬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그동안 찾고 있던 대답이었다.
이 깨달음을 얻으며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이 마음이 혹시 자만처럼 비칠까 잠시 망설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단순한 자부심을 넘어서, 내 삶에서 새롭게 피어난 자각이다. 나는 이제 예술가로서의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내 입을 통해 아트 수업의 선생님들에게 고백처럼 흘러나왔다. "저는 사실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내뱉은 이 한 마디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다. 이는 내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나를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내놓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던진 도전장이었을지 모른다. 혹은 이곳에서 수업을 이끌어가는 선생님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작업하겠다는 무언의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 나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 그토록 숨겨두고 숨기려 했던 나의 모습이 왜 이곳에서 나오게 되었을까? 이 모든 과정이 내 안에 잠재된, 나조차도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위대한 나를 향한 탐구 같았다.
내 안에 있는, 그 위대한 나는 나에게 어떠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직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내 안의 가능성을 믿고 그저 따라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