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내가 속한 재학생 아트 수업에서, 크리스타 교수는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학기에서 그녀는 그림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고, 그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지 방향을 제시하며 탄탄한 기초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녀의 지도는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시각적 장벽을 허물려는 시도로,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가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흐를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림이 가진 의미와 과정을 스스로 탐구하며 두려움 없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그녀의 본뜻이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 글에서 "모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임을 인정하기로 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에게도 여전히 자신 없는 분야가 남아 있다. 새로운 그림을 그릴 때마다 밀려오는 무언가를 놓칠 것 같은 부담감, 내가 정확히 다루지 못할 어떤 디테일에 대한 두려움도 실제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미묘한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하는 내면의 긴장감이기도 하다.
이번 학기 수업을 통해 나는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인물화 등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그림에 적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난 2주 동안 우리는 블러 처리된 이미지를 관찰하며 그림을 덩어리로서 이해하고, 그 속에서 그림의 기초를 형성해 나갔다. 희미한 이미지 속에서 형태와 구조를 찾는 과정은, 그림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배워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번 주에는, 이전에 작업하던 흐릿한 이미지가 아닌 모든 디테일이 선명하게 담긴 오리지널 사진을 기반으로 그림을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수업이 이어졌다. 크리스타는 이 과정에서는 대상의 외형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 관찰하며,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물에 담긴 고유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감각과 집중이 요구되었다.
그렇게 어제 수업에서 처음으로 받아 든 사진은 디테일이 살아 숨 쉬는 오리지널 이미지였다. ‘헉!’ 하고 나도 모르게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그 세밀함이 나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의 선명함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종이에 단순히 선을 긋는 일이 아닌,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은 무언가를 창조해 내야 했기에 더욱 어렵게 다가왔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선을 정성스럽게 더해가며, 그림 속에서 조금씩 내가 찾고자 하는 형체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도 그 속에서 나만의 방법으로 그림의 방향을 찾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주 수요일 아트 클래스에 다녀온 후에는 목요일 아침 브런치에 글을 쓴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미술 교육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이 차이는 나의 일상과도 철학적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사고를 이끌어내곤 했다. 아트 클래스는 단순한 미술 수업을 넘어 마치 인문학 수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때때로 내가 그림을 배우는 것인지, 깊은 사고를 확장시키는 것인지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혼란 속에서 나는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을 이끌어 갈 힘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경험이 내 사고의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수업에서 만난 디테일이 살아 숨 쉬는 사진을 마주하며, 문득 어제 아침에 썼던 브런치 글이 떠올랐다. "미래는 미지의 영역이다"라고 적었던 그 문장이 불현듯 마음속에 새겨졌다. 블러 처리된 사진들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느끼는 막연함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가 선명한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려는 용기마저 잃었을지 모른다. 나의 삶을 탐구하는 여정 또한 흐릿한 가능성을 기초로 두고, 명확함을 더해가며 하나씩 완성해 가는 과정임을 이번 수업을 통해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그림에 적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수업에서 배우기 시작한 이 원리는, 단순히 기술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를 통해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까지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그 원리는 나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적용되고 있으며, 매 순간 불확실한 미래에 색과 형태를 덧입히는 과정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그림을 통해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여정의 한 걸음임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