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tinguish
"선은 구분을 짓게 만들어요."
교수는 스케치북에 한 줄을 그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선은 면을 둘로 나누고, 사물과 배경을 구분하며, 그어지는 순간 사물의 각도와 보는 이의 시각마저 달라지게 한다고 했다. 그 단순한 동작 속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끝에 그려진 선 하나를 바라보며 선이라는 것에 대해 더 멀리,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선은 나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어낸다. 마치 무의식 속에서 나와 너를,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선이 보이지 않게 그어지는 듯했다. 하나의 선이 그어지는 순간, 그곳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분리와 구분이 생긴다. 그 선은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우리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던 요소들도 선 하나로 인해 각기 다른 세계로 분리될 수 있다. 그러한 분리는 명확함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쓸쓸함을 안겨준다. 내가 서로를 구분하고 나눈다고 믿으면서도, 그 선이 나를 고립시키는 걸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 속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 속에서 얇고 투명한 선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 선은 때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견고하게 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내 마음속에 그은 하나의 선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 선은 때로는 연결을 끊어버리고, 나와 한 사람을 순식간에 갈라놓기도 한다.
동시에 그 선은 다름 아닌 나의 경계이고, 나의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혹은 나와 나 자신까지도 구분 짓게 만드는 그 선이, 어쩌면 내가 지닌 가장 깊은 내면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선이 그어지면서 분리된 세계는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혹은 선을 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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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그림에서는 선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교수의 그 말은 마치 선이 더 이상 분리나 경계를 짓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살펴보다가, 결국 초상화를 선택했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는 작업의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게 그어진 선들, 그 선이 만들어낸 거리와 구분에 대한 나의 잠깐동안의 고찰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초상화 속 여인은 흑백으로 표현된 강렬한 존재였다. 색을 철저히 배제한 흑백의 세계에서 그녀는 한없이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얼굴은 부드러움과 강함이 교차하는 명암으로 가득했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물결이 마치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표정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싶었다. 하지만, 그 깊은 눈빛과 미묘한 그늘이 만들어낸 어둠과 빛의 경계가 나에게 더 날카롭게 다가왔다. 어느 한 곳에도 명확한 선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그 강렬한 대조는 그녀의 형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선이 없는 세계에서도 경계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계는 단순한 선이 아닌, 빛과 어둠, 강약과 부드러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로 형성될 것이다. 선이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음을, 그녀의 표정이 증명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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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동안 나는 초상화 속 그녀와 깊은 인연을 맺은 듯했다. 처음에는 낯선 이방인처럼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내면에 잠재된 이야기들이 서서히 내게 전해지는 듯했다. 흑백의 단순한 대조 속에서 그녀는 무수한 감정을 담고 있었고, 나는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느끼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따라가는 내 손은 선을 그리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어느새 그녀와의 교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강약과 어둠, 빛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깊이를 더 알아가고, 그녀도 나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렇게 2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단순히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 그녀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 더 깊은 연결을 그려내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