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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Oct 18. 2024

Flip it over! (뒤집으세요!)

교수 크리스티나가 새로운 그림 레퍼런스를 나눠주면서 처음 한 말은 "뒤집어라"였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그림을 뒤집으라니,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즉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설명을 덧붙였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흔히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어떻게 시각을 제한하는지를 지적하며, 뒤집는 행위가 그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해주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관찰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뒤집으라"는 표현에 숨겨진 깊이 있는 철학적 의미가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보통 사물을 그릴 때는 대상에 대한 기존의 지식이나 기억을 바탕으로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강조한 것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대상 자체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림을 뒤집어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나 상징성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각적 요소들—명암, 선의 굴곡, 그 사이의 미세한 차이—에 집중하는 방법이었다. 이로 인해 대상의 ‘의미’를 넘어 순수한 시각적 경험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종종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눈이다’, ‘이것은 나무다’라는 식으로 머릿속에서 분류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면 눈에 보이는 실제 형태보다는 알고 있는 고정된 형태로 그리게 되곤 한다. 하지만, 그림을 거꾸로 놓고 그린다는 것은 이러한 무의식적인 분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직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도록 강제하는 행위다. 이것은 대상을 철저히 분석하고 관찰하는 시각을 요구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세부 요소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뒤집어서 보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이 나무인지, 사람인지, 또는 건물인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곳에 있는 선과 면, 그리고 명암의 차이들뿐이다. 명암의 미세한 변화는 대상의 입체감을 드러내고, 선의 각도와 길이는 그 대상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대상을 보다 객관적이고 깊이 있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익숙한 것, 알고 있는 것에 의지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익숙함이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거꾸로 보고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은 기존의 인식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본질에 다가가게 해 준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연습은 시각을 넓혀주고, 더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교수님의 조언은 나에게는 예술적 기법을 넘어서 인식의 철학으로 이어지면서,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에 얽매여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림을 뒤집어 보는 행위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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