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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백지위에 쓴 글들,
5권의 책이 되어간다

by 근아

매일매일 백지를 마주한다.

하얀 화면 위에 커서만 깜박깜박.


왜 그 작은 깜빡임이

나의 심장 박동보다 빠르게 뛰어

나를 재촉하는지.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하얘진다.


쓰려했던 말도 사라지고,

쓰고 싶던 감정조차

말끝을 흐리며 도망가버린다.


처음엔 이런 감정이 낯설었고,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여섯 달이 지나고, 1년이 흘러도 여전히 그 불편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물론 처음보다 조금은 나아졌다. 느끼는 강도도 줄었고,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는 횟수도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어떤 날은, 어떤 상황에서는, 자음 하나조차 찍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곤 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어렵게 꺼내놓은 첫 문장 뒤로는, 생각들이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온다는 점이다. 머릿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수많은 문장들이 갑자기 질서도 없이 튀어나오고, 손가락은 그것들을 따라잡지 못해 당황할 정도로 정신없이 타이핑을 해야 한다. 백지 앞에서 그렇게나 오래 망설였던 내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한 문장, 단 하나의 문장을 시작점으로 해서 글이 휘몰아치듯 써 내려가는 그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오늘의 글이 그러하다.


아마도 그래서일까. 여전히 백지를 마주하는 건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란 감정 속에 희미하게 안도감 같은 것도 함께 섞여 있는 것 같다. 물론, 때로는 그 첫 문장을 꺼내는 일이 더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그 무거움이 나를 지탱해 주는 어떤 에너지처럼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첫 문장이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글의 방향을 결정짓고, 결국엔 그 글의 성격과 온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 첫 문장을 대충 쓸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각과 상태로, 지금 이 순간 가장 솔직한 문장을 꺼내려 노력한다.


특히나 나처럼 구체적인 계획 없이, 어느 날 마음속을 스쳐간 한 단어, 문득 떠오른 하나의 이미지, 또는 우연히 읽은 책 한 구절에서 파생된 감정 하나로 글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첫 문장이 가진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방향 없이 쓰기 때문에 더더욱 그 시작이 중요하고, 중심이 되어줄 문장이 필요하다. 가끔은 내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마감 두세 시간 전까지도 아무런 글도 시작하지 않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나라는 사람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처음에는 불안했고, 때로는 자책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움직일 때, 머리가 아니라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비로소 손끝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밀려온 순간에 쓰이는 글은, 언제나 하나의 흐름을 타고 흘러가듯 일관성과 일체감을 만들어낸다. 초집중의 시간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덕분에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쉽게 녹아든다. 나와 나의 이야기가 하나가 된다.


요즘, 5권의 책 출간을 긴 호흡으로 준비하며 글의 구조를 고민하고, 목차를 만들고, 글과 글 사이의 연결을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브런치에 그동안 써온 이야기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었던 그 모든 글들은 결국 모두 나의 이야기였다는 것. 누군가를 위한 글이면서도, 결국엔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글이었고, 그래서인지 글을 쓰는 일이 나 스스로와 나누는 가장 깊은 대화였다는 것을 요즘 더욱더 깊이 깨닫는 중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소재, 누군가의 말, 어떤 사건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는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결은 언제나 내 안에서 울려 퍼진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글쓰기는 단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매일의 나를 조금씩 이해해 가는, 그런 과정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온 글들이, 시간이 지나 하나의 결이 되고,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 되어 나도 모르게 나를 표현하는 글이 되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분명 그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순간의 나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 질문을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언어로 천천히 붙잡아보려 했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어 있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버거웠던 백지와의 대면도, 이제는 나를 발견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백지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간이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 안에 내 하루가, 내 고민이, 내 선택들이, 때로는 내가 말하지 못한 사랑과 후회까지도 스며들어 간다.


그러한 시간들을 지나고 보니, 어느덧 내가 발행한 글의 수가 420개를 넘었다. 그중에서도 60편이 넘는 글이 자연과 호주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애써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반복해서 다루게 되는 주제들이 자연스레 드러났고, 그걸 통해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것인지, 브런치북에 쓰여있는 글들을 보며,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글의 숫자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 숫자들이 곧 시간의 무게이고, 내가 머물러 있던 생각의 자리이자 내가 바라본 세계의 풍경사진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계속 백지를 마주할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 안에 놓여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만나기 위해. 때론 아주 작은 하나의 문장만을 얻기 위해 긴 시간을 멍하니 보내기도 하겠지만, 그 문장이 결국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거라는 걸, 나는 이제 믿게 되었다.


나는 매일매일,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한 문장을 조심스레 꺼내 들 것이다.


그 한 문장이 오늘의 나를 기록하고,

내일의 나의 모습을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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