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제에 내가 빠져 있었던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정확히는 2주 전, 북클럽에서 나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존재감이 올바르게 세워지면, 그건 자연스럽게 사라져요.”
당당하게 말하고 나서, 문득 놀랐다.
‘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한 거지?’
하지만 놀라움보다 먼저 든 감정은 확신이었다.
그건 분명히, 내가 직접 경험한 바였다.
어떠한 의심도 끼어들 수 없는, 내 삶 안에서 체득한 진실이었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걸 진심으로 느낀 적이 있다.
그 순간 동시에 떠오른 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애씀 속에서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각이었다.
자연스럽다는 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기에,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왔던 시간들이 오히려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더 들여다보니,
내가 ‘존재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짜 존재감이란, ‘존재감’이라는 감각조차 필요 없는 상태,
그것이 자연스레 스며든 내 행동과 말투, 표정 속에 은근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내게 하나의 철학적 언어로 이어졌다.
‘무위자연(無爲自然)’ — 노자의 말처럼,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그러한 것.
노자는 말한다.
“도(道)는 늘 무위로 존재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道常無爲而無不爲)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태다.
내가 느낀 진짜 '존재',
바로 이 무위의 상태와 닮아 있었다.
그동안 나는 존재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진짜 존재는, 존재감을 찾은 이후,
존재하려는 애씀이 사라지는 곳에 있었다.
‘나’라는 감각이 없어도 나로서 충분히 서 있는 상태,
나로서의 일체성.
그것이야말로 깊고 단단한 자유였다.
이런 말들은 책에서 수도 없이 읽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자주 들었지만,
내 삶 속 실천을 통해 마주한 이 감정은
더 이상 언어로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진실이었다.
아마도 더 깊은 실천이 있다면,
더 넓고 높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감정은,
억지로 세운 것이 아닌,
자연 속에 스며든 ‘나’라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진짜 존재감이란,
더 이상 나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다.
그저 나로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자유.
그런 존재감은 애써 드러낼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문득,
이 감각조차도 내가 ‘소유’하려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존재하고 싶다는 의지마저
내가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존재는 애써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다.
나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이 모든 것이 내려 놓일 때,
비로소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존재감조차 소유하지 않는 상태.
그것이 존재의 무소유이고,
그저 그러한 나로 머무는 존재의 무위(無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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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1(일)
나 홀로, ‘무의(無爲)’의 과정을 조용히 지나왔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토닥토닥, 쓰담쓰담하며 남기는 기록이다.
애쓰지 않았지만,
그러나 분명 진심으로 지나온 시간이었고,
그래서 더 깊은 감각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여정이, 내가 오래도록 생각해 온
‘4개의 회오리’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이었다는 것을.
억지로 이끌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흘러온 결과.
무위(無爲)의 결과는 때론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나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생각이
그대로 나의 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