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것은,

by 근아

나는 마치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처럼 조심스러웠다.

새로운 아트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였다.


익숙한 준비물이 차곡차곡 담긴 미술 가방을 한 손에 들고,
겨드랑이에는 큼지막한 스케치북을 낀 채,

낯선 교실의 문을 열었다.


같은 수업, 같은 선생님.


하지만 공간이 바뀌었다. 이번 학기는 전과 다른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기로 했다. 낯설은 벽면의 색, 빛이 들어오는 방향, 사람들의 움직임, 창밖 풍경들이, 나도 모르게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내 안의 긴장감은 제법 커져 있음을 스튜디오 안에 들어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지만,

마음은 스스로의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디에 앉아야 할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교실을 훑어보다, 결국 선생님의 책상이 잘 보이는 자리에 나를 위한 자리를 잡았다. 수업을 듣는 데 있어 손짓과 표정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가 생각보다 불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시범을 볼 때마다 몸을 뒤로 돌려야 했고, 스크린에 공유된 그림은 강의용 조명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화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빛 때문에 목을 앞으로 쭉 빼고 눈을 찌푸려야 했다. 자세를 고쳐 앉아도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수업 내내 온몸이 긴장된 채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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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두 번째 수업 날.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나는 또다시 망설였다. 이번에는 다른 자리에 앉아볼까? 지난 시간의 불편함은 생각보다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깐, 아니 어쩌면 별다른 고민도 없이, 나는 또다시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내 짐을 풀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불편함을 알면서도 나는 또 그 자리에 앉았다. 단지 지난 2시간, 그곳에 있었단 이유만으로. 그 자리는 어느새 내 공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끌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시선이 머무는 벽에는 붉은 흙빛의 원주민 그림이 걸려 있었고, 뒤로 고개를 돌리면 선생님의 책상 위에 펼쳐진 물감과 붓들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붓들이었다.


내 자리에선, 필통을 꺼내 놓는 위치, 스케치북을 놓는 방향, 종이를 기울이는 각도까지도 내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고, 마음은 따라 흘렀다. 어쩌면 불편함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사람을 더 쉽게 움직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불편함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를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 예측 가능한 어색함 속에서, 나는 다시 자리를 잡았다.




낯선 공간에서 ‘내 자리’가 생긴다는 것은 단순한 공간 점유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곳에 앉아본 적이 있다는 사실, 그 시간 동안 느꼈던 감정, 눈에 익은 배경들이 하나씩 켜켜이 쌓이며 내 안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준다. 그 익숙함은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 어색함을 감싸주는 여백 같았다. 완벽한 자리는 없으니 말이다.


어느 곳이든 불편한 점은 있기 마련이고, 나를 위해 준비된 공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익숙함은 그런 불완전함을 감수하게 만든다. 어제의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오늘의 내가 다시 앉고, 내일의 내가 또 앉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반복하다 보면 그곳은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게 된다. 불편함도, 눈부심도, 고개를 돌리는 동작조차도 어느새 내 리듬의 일부가 된다.


익숙함에는 불편함이 함께 들어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고, 눈을 맞추고, 자신만의 속도로 공간을 채워간다. 나 역시 그렇게 한 걸음씩, 이 교실에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익숙해진다는 건,

결국 내가 그 자리에 마음을 내주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문득 들어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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