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재 Sep 20. 2024

[마술피리] 9화

디저트가 나왔다. 디저트가 서빙될 때, K는 레드 와인을 한 잔 더 주문했다. 나에게도 마실 의향이 있냐고 물었지만, 두 잔이나 마셔서 취기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크렘 브륄레와 아이스크림. 나는 홍차를 마시고, K는 와인을 마셨다.

나는 마지막으로 K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예술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 질문에 장시간 숙고를 했다. 디저트를 비울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로 곰곰이 뭔가를 생각했다. 내 질문이 추상적이고 거대한 질문이었는지 자문해 보았지만, 사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홍차가 맛있네. 예전에는 반드시 홍차에 설탕을 넣어서 마셨거든. 우유도 조금 추가해서. 홍차의 향보다는 밀크티의 달콤한 맛을 더 좋아했던 것일지도 몰라.

이제는 홍차에 레몬을 넣어서 마셔. 여기는 정말 훌륭한 레스토랑이다. 홍차에 넣을 레몬 조각도 같이 주니까. 황송한 대접을 받은 기분이네.”

K가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는 예술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죠. 예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받은 그 순간에는 짓궂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와 오래 촬영해 온 S님이니까, 괜히 던져 보는 질문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진심으로 예술이 뭔지를 궁금해 하시는 거니까요.

제가 하는 여장 코스프레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이겠지만, 한편으로 서브컬쳐에서 비롯한 단순한 ‘여장 취미’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평가하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맥락 아래에 이 사진들이 놓이게 되는지, 시간의 경과는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예술이라는 평가의 유무가 결정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잘 만들어진 예술로서 코스프레를 강력하게 변호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어요.

왠지 그건, 하나의 허위 위에 다른 허위를 덧붙이고 나서 예술로 포장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제가 촬영을 할 때의 마음가짐과 결과물이, 예술이라는 포장에 의해 훼손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어요.”

“네가 생각하는 예술은, 포장과 바운더리 안에 있는 거야?”

“네. 더 좋은 대답이 있다면 바꾸겠지만, 지금은 포장과 바운더리 안에 있는 작품이 예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네요.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서양 회화의 원근법은 우리가 실제로 세계를 바라보고, 표상하고 느끼는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어요. 원근법은 시야의 원초적인 한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서 전개되는 방법(technic)이니까요. 말 그대로 새로운 예술을 시작하기 위한 방법인 거죠.

그렇게 말하면 회화의 원근법은 별로 새롭지 않은 기술이겠지만, 그럼에도 투시 원근법이 예술에 불러온 혁신은 대단한 거잖아요.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 시대 이후 미술은 꽤나 시시한 게 되겠죠. 마찬가지로 예술로서의 사진도, 랜디스가 추구한 것처럼 자연의 끝으로 가서 촬영한 빙하의 사진과 아마존의 사진과 같은 것도 예술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찍은 코스프레 사진이 예술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죠. 편견이 있는 사람은 저와 반대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홍차를 마시고, K는 남은 와인을 끝까지 마셨다.

그러고 보니, K와 솔 사이에는 공통점이 둘 있었다.

술을 잘 마신다는 것. 화이트 와인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갑자기 솔이 그리워졌다. 솔을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영어학원에서 열심히 학생을 상대하며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월급으로 바꾸고 있는 솔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와 촬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K와 촬영하는 동안에는 솔과 함께 촬영을 할 수 없다.


레스토랑을 나와서 골목길을 걷는 동안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내 주관적인 느낌을 배반하듯 시간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해가 진다는 사실. 하늘의 색이 변한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놀라워했다. K에게 얼마 전 솔과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쉽다는 말을 했다. 그가 보기에도 우리는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던 것 같다. 골목길을 걸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보잘것없는 재능에 불과하며, 촬영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K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S님은, 스스로가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S님이 찍는 사진에는 피사체의 영혼이 들어가 있어요. 랜디스와 비교하는 건 약간 그렇지만…… 랜디스가 찍은 사진에는 제 영혼이 들어가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죠. 칭찬이라면 그런 식으로 칭찬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달콤한 말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S님의 사진에는 불멸하는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 사진에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영혼을 믿는구나. 불멸하는 영혼을.

우리는 앞으로도 잘 해 보자는 말을 끝으로, 역 앞에서 헤어졌다.


올해 대학교 4학년으로 올라간 K는 대학원 첫 학기에 들어간 나와는 달리 시간의 여유가 많았다. 그는 경영학과라서 졸업 논문을 졸업 시험으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논문을 쓸 필요도 없었다. 월에 두 번의 만남이면 자주 만난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촬영을 할 때마다 대여섯 시간을 소모했고, 촬영이 끝나면 둘 다 기진맥진했다.

결국 나는 공대 대학원 첫 학기 수업을 드랍하고 3학점만 듣게 되었다. 내가 듣는 3학점 수업은 기초 연구 수업이었기 때문에 매주 여섯 시간만 투자하면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한 다음 A+를 받을 수 있었다. 주중의 나머지 시간에는 연구실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했지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연구실은 주말 출근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매주 일요일에는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K의 코스프레는 화려해지고 과감해졌다. 의상도 화려하고 캐릭터의 선택도 과감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들은 수위를 잘 조절했지만, 부계정에 한 번 올렸다가 하루이틀 뒤에 삭제하는 사진은 매우 야하고 어깨나 팔의 노출이 많았다. 나는 그런 야한 사진을 공개해도 되냐고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장 코스프레를 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춤을 추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거대한 DSLR을 들고 그를 향해 조리개값이 낮은 망원렌즈를 들이대면, 동물원의 우리 속에서 당장이라도 탈출할 것 같은 야생 동물 같은 뭔가가 보였다. 동물은 펜타프리즘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자세를 바꾸면 다시 나타났다가 사진을 찍고 찰칵 소리가 들리면,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코스프레 촬영이 끝난 뒤에는 식사를 하고 헤어질 때도 있었지만 바로 수원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사진 편집을 할 때도 있었다. 고화질 사진을 편집하는 전용 프로그램을 열어서 메모리 카드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의 로우(RAW) 데이터를 불러오고, 하나씩 손을 대서 빛의 노출을 조절하고 컨트라스트를 넣고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잡티를 꼼꼼히 지웠다. 편집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 장에 5분이면 충분했다.

여장을 하고 카메라를 향해서 어떤 구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다 보면, 야생 공작이 구애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야생 공작이 한 곳에 둘러모여서 수컷 공작의 구애를 지켜보면서 암컷 공작이 마음에 드는 수컷을 간택하는 것처럼, 그는 인스타그램 계정의 비좁은 네모난 창을 통해서 1.8만 명의 팔로워에게 일방적인 구애의 몸짓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코스프레를 ‘구애’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구애는 구애의 몸짓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주체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그의 구애의 몸짓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K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코스프레를 한 캐릭터가 얼마나 ‘여자’에 가까운지, 얼마나 귀엽고 아름답게 2차원의 세계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를 모방하였는지 등을 냉정한 시선으로 평가했다.

그렇지만, 사진가의 입장에서 보면 K의 구애는 어느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K에게 있어 수컷 공작의 구애는 내면의 아름다움—영혼의 아름다움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면의 아름다움은 곧 영혼의 아름다움일 것이다—을 표현하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했다. 만약 내가 구애의 몸짓을 바라보는 사람에 들어간다면, 어쩌면 내가 구애의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K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인간임에 분명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찰칵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흘러갔다. 뜨겁고 아름다운 계절인 여름이 찾아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