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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Oct 07. 2024

[마술피리] 14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솔과 나는 다소간 떨어진—그렇지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좌석에 앉아서 각자의 사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K와 나, 그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을 거고, 나는 내 나름대로 부산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중요성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K가 도망친 것.

그것보다 덜 중요하지만 중요한 정보는 K가 보낸 메시지들.

솔과 내가 수영장에서 한 대화.

그 전날 밤에 솔이 찾아와서 같이 식사를 한 것.

그러고 보니 전날 밤의 식사에서는 솔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할 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비행기의 소음이 기분 좋게 들려서 도착 전까지 잠깐 잠들었다.

K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다음 주말이었다.

오늘 촬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볍게 하자는 말.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3시간 촬영하고 나서 바에서 술을 한 잔 하고 나서 헤어졌다.

그날 K가 한 말은 가감 없이, 생략 없이 이러했다.

“이번 촬영을 마치고 당분간 쉬고 싶어요. 졸업시험도 준비해야 되고, 영어 성적도 받아두어야 하고, 거의 안 갔지만 동아리에도 작별 인사를 해야 되거든요. 저번에 제가 도망쳤을 때 솔 씨가 많이 놀랐죠?

아마 저라도 누군가가 여장하고 도망친다면 크게 놀랐을 거에요. 그 때는 죄송했습니다. 만나서 전부 털어놓기에는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이 너무 많았어요.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이만 명을 찍어보고 싶었는데, 어렵게 되었네요. 제가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달성했을지도 몰라요. 하하.

모든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고, 저는 거기에 책임지려고 해요.”

“책임을 지다니, 어떻게?”

“인스타그램 계정을 올해 말에 삭제하려고 해요. 올해 말이라고 해도 시월이 될 수도 있고, 십일월이 될 수도 있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안에는.”

솔이 한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열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와, 내 안에 있지만 스스로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물(異物) X. 그는 X를 사랑했음이 틀림없다.

나는 X를 사랑하는 데 실패했고, 따라서 K가 X를 얻게끔 만드는 것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타인은 나의 거울이 될 수 없고, 나는 타인의 거울이 아니다.

우리는 타자를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솔 씨에게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 저는 어릴 적에 소년원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6개월 정도?

그거 때문에 군대도 보충역 판정을 받았어요. 건강한데.

제 친구들은 나쁜 아이들이 많았지만, 알고 보면 심성이 착한 친구들이에요. 남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선뜻 배려의 손길을 내밀지 못할 뿐이죠.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친구가 죄를 지으면 감싸주고 싶어지는 것도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게 되는 마음이잖아요. 그런 마음을 선이라고 부를지 악이라고 부를지는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겠지만. 저는 그 친구들의 인생이 전과로 시작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건의 주모자는 저라고 그랬죠. 말 맞추기도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세 명은 서로 친했으니까.

나머지 두 명은 벌금형을 받고 보호관찰 처분을 받았고, 저는 6개월 들어가 있는 대신에 친구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 정도 거래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물었다.

“그렇게 해서 너는 전과를 갖게 되고, 대학교에 들어온 거야?”

“네. 그 일이 있고 나서 친구들과 연락한 적은 없어요. 연락할 생각도 없고,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대학교에 입학하니까 누구도 저를 전과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고, 공부를 잘 하니까 사회성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저를 따돌리지도 않았어요. 지난 사 년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답니다.

해피 엔딩.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은 배드 엔딩이 많았지만, 제 인생은 해피 엔딩으로 끝났네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서 바텐더에게 추가 주문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술 한 잔으로는 끝나지 않을 듯했다. K도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말 없이 앞으로 나온 칵테일을 집어들어서, 잔을 기울였다.

그게 실제로 그와 만난 마지막 날이었고, 그 후로 어디에서도 그를 보지 못했다.

거대한 시간이 경사면에서 굴린 스노우볼처럼 빠르게 굴러갔다.


나는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난 뒤 전문연구요원으로 병역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을 받으면서 3년 동안 일해야 되었지만 정작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며 상사의 괴롭힘도 없어서 할 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회에 참석해야 될 일이 생겨서 오랜만에 서울에 놀러 나갔다. 공교롭게도 내가 참석하는 학회는 Y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서울에 온 게 오랜만이라서 하마터면 가는 길을 잃어버릴 뻔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Y대로 가는 경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하철 앱을 열어서 9호선 - 2호선을 확인하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신촌역에 내리고 나서도 Y대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몰라서 허둥거렸다. 저쪽 방향에 있는 건 확실한데, 저쪽 방향이 정확히 ‘어느 방향’인지 떠오르지 않아서 힘들었다.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 Y대 정문을 지나서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완전히 바뀌어서 예전의 대학교는 아예 사라지고 새로운 대학교가 그 위에 랜드마크처럼 세워진 것 같았다. 멋지기는 했지만서도 예전처럼 대학교스러운 분위기가 없어지고 마치 미국의 어느 상업 시설 같았다. 하지만 오래 된 건물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학회가 열리는 제2공학관을 찾아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을 구경했다.

예상한 대로, 예상대로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캠퍼스 내부를 돌아다니는 학생의 수가 많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유행 이전과 비교해도 꽤나 많은 수의 학생이 둘로 나눠진 인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먼 곳에는 변하지 않는 낡은 건축물이 보였고, 가까이에는 학생회관 건물이 있고 지하의 아케이드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학회는 아침부터 열리기 시작해서 이제 곧 발표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공학관이 있는 부지의 왼편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점심 시간을 조금 지나서 오전 발표 타임이 끝났다. 나는 예전에 대학원에서 신세를 지었던 박사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바깥으로 나왔다. 박사님은 정확히 나보다 10살이 많았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언제 결혼할지에 대한 고민이 큰 것 같았다. 오늘 만나서 대화를 했을 때도 첫 말이 “너는 여자친구가 있어서 참 부럽네” 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요즘도 여자친구와 함께 촬영을 다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에,

“석사를 졸업하고 나서는 서로 바빠서 촬영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박사님은 연구와 생활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만약 연구자로 살 거라면 자신의 생활에서 어느 부분을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활에서 어느 부분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연결되는 건 아니라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박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천천히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무 생각 없이 언더우드 건물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사람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K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져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K는 귀 밑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둥근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 본 그 사람은 뿔테 안경이 아니라 나안이었고 머리카락은 귀 옆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투블럭 스타일을 하고서, 초록색 체크무늬 셔츠와 감색 바지를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사람의 모습은 지나치게 낯설었다.

하지만 얼굴 모양이나 보조개는 그대로였고, 내가 그 사람을 K로 재인식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K여야 했다. 만약 그 사람이 K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K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박사님이 “왜 그래?” 하면서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냐면서 박사님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진짜로 진짜로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하고 나서 나는 다시 걸어갔다.

식당이 있는 학생회관 앞에서, 누군가가 나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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