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은 이제 풀 위로 올라가서 풀사이드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섰다. 그녀가 입은 전신 수영복에서 초록색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네가 이해하는 것처럼 일들이 단순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걸.”
“일에는 이면이 있으니까?”
“일에는 이면, 삼면, 사면. 그리고 사면초가에 몰린 너는 외치겠지. 아마도 이렇게. 내 옆에 그녀가 있었다면!”
솔을 보고 그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정말로 적극적이었다. 그렇지만 ‘적극’이라는 성격 자체는 예전부터 그대로였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솔이 적극적이지 않다고 느낀 점은, 연애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솔의 내면에는 사랑하는 상대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것도 아직 내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어떻게 경험을 더 쌓으면 좋을까?
내가 풀 위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그녀가 자세를 잡더니 다시 풀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이 없는 수영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아이들과 같이 수영하고 대화를 나누고, 그러고는 다시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가 벽을 손으로 터치하고 반대편을 향해서 헤엄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사람과 그 사람을 보는 사람을 그림으로 그린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호크니가 기억하기에 그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면 그런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솔의 수영을 보면서 나는 순수하게 기쁨을 느꼈다. 지금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는 사실 잘 모른다. 그와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기쁨이었다.
수영을 한 뒤에 샤워를 마치고 내가 묵는 방으로 돌아왔을 때 K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이번에는 내용이 길었다.
「방금 서울역에 도착했어요.
이제 저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가 자주 가는 바에 갈 거에요. 바에는 주말이라서 사람들이 많을 거고 그들은 저를 보고 여자 손님이 왔다고 생각하겠죠.
그건 익숙한 일이지만, 언제나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아직도 뭐가 부족한지는 잘 모르겠지만……세상에서 그것을 채워줄 사람은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코스프레를 하고 S님을 불러서 사진을 찍는 것이겠지만요.
세상에 바꿀 수 없는 불공평과 불평등이 있다고 해서 이 세상을 향해서 엿을 날릴 수는 없는 것처럼,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스토킹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죠.
아닌가요? 우리 세계는 스토킹 정도는 받아들이면서 여러 사람들을 스토킹하고 도촬하고 탐문하고, 그렇게 굴러가는 건가요?
저는 솔 씨를 좋아하지만 솔을 좋아하는 S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아니, 당신에게 어떤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건 제 문제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 촬영도 즐겁게 해 보자구요!」
추측컨대 K는 본능적으로 솔이 자신을 스토킹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백화점에서 의상을 준비했을 테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야외 극장에서도 한 줄 뒤에 앉기로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극이 진행되는 동안 재빠르게 옷을 갈아 입었는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지만, 코스프레의 전문가인 K라면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기란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매일매일 남성과 여성을 반복하는 그에게 여장은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은 솔이 방문하지 않았다. 혼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나도 방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테이블에 앉아서 매우 오랜만에 일기를 쓰기로 했다. 일기를 쓰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다. 남들에게도 일기를 매일 쓰라고 권유하고 싶을 지경이다.
오늘 일기는 길어졌다. 일기를 다 쓰고 나서 시계를 보니까 오후 11시였다. 일찍 자고 조식을 빨리 먹는 게 낫겠다 싶어서 우선 침대에 들어갔다.
결국 잠이 안 와서 30분이나 뒤척였다.
우리는 같이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까지 가기로 했다. 조식을 먹고 있을 때, 솔은 아주 오래 전부터 결심한 일을 털어놓는 것처럼 가만히 말을 시작했다. 호텔 조식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나는 솔의 이야기를 듣는 게 반가웠다.
“나도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갈까 해. 너만 괜찮다면,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은데.”
그녀가 말했다.
“그래.”
문제 없다.
“같은 비행기라고 해도 옆좌석에 앉아서 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럴 생각은 없어. 그냥 KTX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는 게 싫을 뿐이고, 그 이유는 너도 알겠지만 K 때문이야.”
“그래.”
그녀는 결코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릇에 올라간 음식들의 가짓수는 적었다.
“지난 밤에 수영을 하고 돌아와서 생각해 보았어.
뭐가 옳고, 뭐가 그르고, 뭐가 옳고 그르지도 않은지.
내가 생각하는 걸 말하자면, K는 자신의 곤경을 최대한 회피할 뿐이야.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많이 있어. 이런저런, 밝고 어둡고 흐리고 맑은 장소에서 암약하고 있을 걸.”
“그래.”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라는 말 있잖아?”
“있지.”
"K의 입장에서 보면, 너는 몇 번을 찍어야 넘어가는 나무일까? 한 번이라도 K의 입장에서 너를 판단한 적이 있어?”
“없어.”
“K는 너에게 많은 공을 들였을 거야.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피로감을 느꼈을 거야.
아무리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있으면, 너라면 어떻게 할래?”
솔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 나무 찍기를 포기하겠지. 나무 속에 금은보화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나도 좋아해.
그런데, K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는 너가 아니라 K일 거야. 다시 말해서, 그가 언제까지고 나무 찍기를 하면서 보물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거고. 나는 K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K는 나와 다르고, 여자가 되는 일에 뛰어나고,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그래도 K가 너를 열 번이나 찍었던 이유는 이해해.”
“그래?”
“추측이 맞다면, K는 너라는 인간보다는 네 속에 있는 무언가를 좋아했을 거야.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니 그냥 X라고 부를게. X를 가진 너를 좋아하는 K가 보수까지 주면서—다른 사진가들에게는 무보수로 촬영을 하자고 제안했다고 하던데—너와 함께 일 년 가까이 촬영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녀는 강조점을 찍듯이 힘있게 말했다.
“너일까, 아니면 네 속의 X일까?”
솔은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서 빵과 치즈, 베이컨, 소시지를 하나로 결합시켰다. 유럽식 샌드위치를 즉석에서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손가락으로 X 표시를 만들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 안에 있지만 나도 알지 못하는 X.
평범하지 않은 대학생인 K가 열 번을 찍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그만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 가구야 공주와 함께 대나무에서 나온 금은보화. 거기에서는 공주와 금은보화만 아니라 수십 가지 기모노도 나왔다.
가구야 공주는 결국 기모노를 벗어던지고 멀리멀리,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도망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