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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Sep 30. 2024

[마술피리] 12화

가는 길에 솔은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다.

“영화의 전당에는 야외 극장이 있다고 해. 야외라서 4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거리두기를 하게 되어서 실제 수용인원은 2천 명. K와 그의 가족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좋아해서, 이번에 영화의 전당에서 열리는 공연에 참석하게 되었어. 그쪽 관계자와 깊은 친분이 있는 모양인지 가장 앞 좌석에 앉는 모양이야.

우리는, 내 잘못이긴 하지만, 앞줄에서 조금 떨어진 가운데 좌석에 앉을 거야.

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는 아니야. 중요한 문제는 K가 가족과 친한 편이 아니고, 그래서 극의 중간에 나가버릴 수도 있어. 그러면 우리는 K를 쫓아가야 하는데 쉽지는 않을 거야. 알다시피 가운데 좌석에서 주변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자리를 빠져나가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자. 이제 질문 있어?”

다른 것보다는 K의 정보를 캐 낸 방법이 궁금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솔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해 주었다.

“부산에 친구가 있어. 구글링과 정보 수집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한 친구가. 나도 처음에는 자세하게 캐 낼 생각이 없었는데 해 보니까 재밌더라고. 그러다가 우연히 K 가족이 부산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거야. 천운이라고 생각했지.”

모든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 K의 비밀은 아마 가족일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이혼 소송 전문 변호사라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필요가 있다. 이혼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조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올 테니까. 아버지의 직업은 의외다. 음향 엔지니어라니, 완전히 이과 아닌가?

영화의 전당은 센텀시티역에서 나와서 걸어서 10분 정도다. 솔과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없어 보이는 거리를 걸었다. <마술피리>는 모차르트가 남긴 오페라 중에서도 구성이 복잡하고 내용이 길어서 따라가기 힘들다. 1부/2부, 1부/2부/3부 등으로 나눠서 공연을 하는데 이는 이야기를 기승/전결 식으로 나눈 것에 대응한다. 밤의 여왕이 왕자를 불러들여서 왕자가 마술피리를 들고 공주를 구하러 간다. 공주를 구하려다 보니까 악당이 선한 편이고 밤의 여왕이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왕자는 새잡이 파파게노와 함께 침묵 수행을 하고 물과 불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다. 파파게노는 짝 파파게나를 만나서 결혼하고, 왕자는 공주와 결합한다. 그리고 밤의 여왕이 지키던 세계가 무너지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솔은 오페라 자체보다는 K와 만날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K가 차지하는 지분이 매우 클 테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모든 일의 원흉은 내가 K의 요구를 수락한 것이고 코스프레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도 변명할 수 있다. 솔이 바빠서 촬영을 하지 않았기에 K와 촬영할 명분도 있고, 그리고 K의 여장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촬영하는 입장에서도 나름 즐거웠다. 그와의 촬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솔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겠지. 없을 리가 없다.

따라서 귀납적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정 좌석에 앉기 전에 우선 그의 위치를 확인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그의 가족은 앞자리 로얄석에 있었다.

K는 아버지와 닮지 않았지만 어머니와는 많이 닮았다. 남자는 주로 어머니를 닮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시작 시간은 오후 한시였지만 12시 50분인 지금도 좌석은 거의 다 차 있다. 부산의 고급 예술 향유층은 지각을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앞줄에서 열여섯 번째 줄의 가운데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거리두기 때문에 솔과 나 사이의 좌석은 막혀 있었다. 나는 일회용 마스크를 잠시 벗고 호텔 냉장고에서 가져온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다.

이윽고 오페라가 시작되었다. 원래 <마술피리>는 실내에서 공연되고, 야외에서 한다고 해도 저녁에 하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낮에 하는 게 신기했다. 연출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니나다를까 위에 가림막을 넓게 펼쳐두었다. 그렇기에 무대 쪽은 어둡고 무대 바깥은 밝은 이상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가림막을 치고 조명을 넣어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 같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한낮과 한밤이 섞인 집 그림이 생각났다.

별다른 해프닝 없이 오페라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 구절까지 흘러갔다. <밤의 여왕의 아리아>는 자신의 딸 파미나 공주에게 밤의 여왕이 칼을 쥐어주면서 자라투스트라를 죽이라고 부탁 혹은 명령하는 내용인데, 가사가 ‘자신의 부탁을 듣지 않고 자라투스트라를 살려두면 모녀의 연을 끊겠다’는 매우 무서운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조수미가 부른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가장 유명하지만 디아나 담라우, 나탈리 드세이 등 유명한 소프라노가 부른 버전도 있다.

아무튼간에,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오페라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의 좌석에서 20대 여자처럼 보이는 머리가 긴 사람이 관객석에서 빠져나와서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앞좌석이긴 하지만 정확히 몇 번째 줄에서 빠져나왔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가 K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리아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솔에게 말을 거는 것도 민망했다. K가 아니라 평범한 여자라면 허탕을 친 셈이니까. 나는 초점을 맞춰서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가 K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부가 끝나고 우리는 몸도 풀 겸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은 내려가서 K가 가족들과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그랬다. 나는 전원을 꺼 두었던 스마트폰을 켜서 오페라를 보던 사이에 온 메시지가 없나 확인해보았다. 트위터 알림 두 건, 문자 한 건, 문자는 K로부터 온 것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그에게 페이스타임 전화를 걸었다. K는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즐거운 듯 말했다.

“아하핫. 지금 저는 부산역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역시 너였구나. 아까 자리에서 빠져나온 여자는.”

“네. 가족이 눈치채지 못하게 옷을 갈아 입고 가발을 쓰느라 고생했지만요. 다행히 저만 한 줄 위라서 오페라에 몰입한 가족을 속여넘길 수 있었죠. 그럼 바빠서 이만. <마술피리>는 재밌더라고요.”

감시를 하러 간 솔이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당연하지만 크게 놀란 반응이었다. 잔숨을 헐떡거리면서 말을 이어 갔다.

“이건, 젠장…… K가, 변장을 하고, 빠져나갈 줄이야!”

나는 K가 보낸 메시지를 솔에게도 보여주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죠. 네 인생을 즐기라고.

두 사람이 인생을 즐기셨으면 좋겠네요.」

솔은 지금 당장 부산역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나는 이미 K는 부산역에 도착해서 서울행 KTX를 탔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가 K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다른 의미에서 K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선언을 우리에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술피리>를 끝까지 보고 나서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솔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겠다고 해서 그러면 나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돈을 내면 팬츠와 수영모를 빌려준다고 한 게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케미 호무라가 방에 들어가서 신경질적으로 옷을 갈아 입고 치마와 스타킹을 침대 위로 내던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솔과 나는 저녁 일곱시에 호텔 10층에 있는 전용 수영장에서 만났다. 재회의 순간에는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수영모를 쓴 그녀가 풀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말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온천에서 솟아나는 온수처럼 오늘 있었던 일을 조금씩이나마 정리해 나갔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왜 호텔의 중간 층에 수영장이 있는 걸까? 넌 알아?”

“나야 모르지.”

“내가 생각해 봤는데, 호텔의 어느 층에서든 손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중간 층인 10층에 둔 게 아닐까 싶어.”

그렇게 말하고서 솔은 말을 멈추었다.

무슨 말일까? 수영장의 층수가 그리도 중요한가?

나는 염소를 푼 수면 위에 둥둥 떠 다니면서 설명을 기다렸다.

“S는 K가 극의 중간에 도망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야. 왜냐하면…… 그건, K가 누구보다도 잘 하는 일이니까.

Am I correct?”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은 뒤에 사흘 지나서 부활했을 때, 그 때는 Resurrection이라고 말하고, 예수가 이 세상에 신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때는 재림(Parousia)이라고 하는데,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으려나?”

“재림은 다시 임하신다는 말이고, 부활은 말 그대로 부활이잖아?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죠. 재림은 복음과 함께하는 것이고 부활은 신의 대속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거지. 둘은 완전히 달라. K와 나 사이의 차이점들보다는 훨씬 더.”

“다시 말해서, 너와 K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다?”

“아니.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둘을 동시에 이해할 가능성이 존재한단 거지. 인간이 예수가 태어난 의미를 전적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르게.”

솔은 말을 잘 한다. 그것도 한번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을 잘 하는 편이다. 솔이 예수님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만큼 대낮에 벌어진 K의 교묘한 도망이 충격적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풀의 반대편으로 헤엄쳐 갔지만 곧바로 이쪽으로 돌아와서는 수영모를 벗었다. 약간 젖어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온 방향으로 휘날렸다. 조각난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나는 말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K하고 촬영을 할 일도 없을 거야.”

“그러면 다행이네. 아닌가? 너는 K에게서 월마다 보수를 받고 있으니까. 보수가 없어지면 생활이 곤란하지 않아?”

“그것도 어떻게든 되겠지.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고.”

“만약 장학금을 못 받으면?”

헤엄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아이들이 너무 어린데도 수영 실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어떻게든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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