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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Sep 27. 2024

[마술피리] 11화

이런저런 것들에 가려서 김중업의 건물은 윗부분, 4층과 오른쪽 가장자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런 건물이 진정한 건축물이고 저곳에는 칠십 년에 달하는 역사가 있으니 사람들도 함부로 철거하자느니 새 건물을 짓자느니 하는 말들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산대 부지 안에 있는 오래 된 나무들보다 중요한 건물은 저것 하나밖에 없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 동시에 충만한 기분으로, 활력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으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솔과 점심 식사를 하고 잠깐 산책을 하다가 부산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가 있는 해운대 근처로 갔다. 해운대역에서 내려서 바닷가를 걸어 보려고 했지만, 모래사장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피서객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곧바로 포기했다. 지금이 성수기라는 것을 체감했다. 호텔에 들어가서 빠른 체크인이 되냐고 물어보았더니 두 시 사십 분에는 입실이 가능하다고 그랬다. 호텔 안에는 카페가 있었는데 아메리카노가 너무 비싸서 다른 음료를 마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솔에게 가격표를 가리키면서 무슨 음료를 마시고 싶냐고, 이번에는 내가 사겠다고 말했더니 “그럴 필요는 없지만 사 준다면 감사히 마실게”라고 그랬다. 우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떼를 들고 와서 창가에 면한 자리에 앉았다.

넓은 유리창으로 해운대의 풍경이 보였지만 모래사장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사실 인간으로 바글바글한 모래사장을 굳이 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발렛 파킹을 하기 위해서 호텔의 현관으로 느리게 들어오는 차들이 보였다. 부산은 길이 복잡해서 렌트를 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지만, 여행으로 이곳에 온 사람들은 자기 차를 끌고 오는 경우가 많은 듯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전을 하면 대략 4~5시간 걸린다. 그 정도라면 렌트카를 빌리는 것보다 자기 차를 가져오는 게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솔은 이 날씨에 뜨거운 카페 라떼를 마시면서 이곳의 라떼는 우유의 향이 진해서 재미있다는 감상을 남겼다. 나는 부산에 있는 호텔에 딸린 카페니, 우유도 부산우유만 쓰지 않겠냐고 말해보았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른다. 부산우유는 서울우유처럼 부드러울 수도 있고, 반대로 매일우유처럼 마지막에 입에 남는 느낌이 독특할 수도 있다. 솔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바깥을 무관심하게 응시하고,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무관심하게 차들이 들고 나는 모습을 응시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솔과 함께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 적도 처음이었다. 솔은 대학생 때부터 호텔의 룸 서비스나 내부의 수영장에 관심이 많아서 호캉스를 즐겼다. 거기에는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같은 호텔에서 9박을 하며 기말고사 시험을 준비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녀와 그 호텔에서 3박을 하며 같이 기말고사 시험을 준비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룸 업그레이드를 받아서 원래 예약했던 디럭스룸이 아니라 킹사이즈 베드가 있는 스위트룸으로 받았다. 가방을 방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냉장고의 문을 열어서 생수를 한 병 꺼냈다.

죽을 정도로 목이 마르지는 않았지만 뭔가 답답한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누군가 앞에서 이를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이다. 물을 한 통 비우고 샤워를 하고 나와서 모래사장을 보려고 바닷가에 나갔다. 별 볼 일 없는 모래사장이었지만, 바닷물은 시원해 보이고 파도가 아름다웠다.


솔에게 전화를 했다.

몇 시? 일곱시. 알겠어. 나는 저녁을 먼저 먹을게. 응. 괜찮을 거야, 안 괜찮으면 나중에 복수하면 되지. 차 조심하고. 일만 보를 채울 때까지 영원한 모래사장을 걷기로 했다.

나사에는 십자의 홈이 파여 있고 십자의 홈은 규격이 맞는 드라이버만 받아들인다. 나사의 몸통에 파여 있는 나사산은 나선형을 그리고 있는 게 보통인데 나사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삽입이 되는 나사가 표준형이다. 나와 솔의 관계는 나사와 드라이버를 닮아 있었다. 내가 솔에게 맞춰서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그녀가 움직였다. 솔이 나에게 맞춰서 돌리면 우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이 사회의 가장 필요한 곳에 삽입하기 위해 궁리하는 척을 했다. 솔이 코스프레를 하면 내가 거대한 DSLR을 들고 사진을 찍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솔의 필요는 코스프레 업계에 있었고 그 업계 내부에서라면 그녀는 그녀가 허락하는 만큼 자유로웠다.

솔은 자신을 광고하지 않았다. 광고와 PR은 전부 내가 도맡아서 했다. 드라이버는 나사를 끼워 맞추기 위해 피를 흘리면서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끝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만약 미친 사람이 솔을 스토킹하려는 의도를 갖고 솔을 쫓아다니다가 칼로 찌르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현재 그녀는 코스프레를 그만두었고 나는 호텔의 침대 위에 누워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룸 서비스와 맥주.

맥주는 호텔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 왔다. 맛을 생각하지 않고서 최대한 거품이 없는 가벼운 라거로 골랐다. 무엇을 마시든 간에 취하는 건 똑같으니까. 룸 서비스는 치킨과 피자 1/2판이다. 저녁 일곱시에 일이 끝난 솔은 잠깐 부산에 있는 본가의 친척 집에 들렀다가 아홉시에 호텔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손목시계를 보니까 오후 일곱시 반. 저녁을 먹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다.

왜 부산 여행을 따라온다고 했는지—자신의 선택임에 분명했지만—이해할 수 없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날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솔은 업계인들 중에서 가장 ‘정상성’에 가까웠다. 그녀는 성소수자도 아니었고 애니메이션과 만화 등에 심취한 오타쿠도 아니었고,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일반인’이었다. 그에 비하면 K는 ‘정상성’을 그 표면에서부터 와해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K의 지정 성별과 외면이 지시하는 성별은 불일치했다. K의 감성은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게이나 바이로도 환원될 수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인 규범을 거부했다. 하지만 전혀 미치지 않았고, 여장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이런 관계는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

문제: 관계가 끝나는 시점을 서술하고 이유를 증명하시오.


솔은 아홉 시를 갓 넘겨서 내 방을 찾아왔다.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으므로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돈한 뒤, 좌우가 넓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는 이미 유리잔이 두 잔 놓여 있었다. 그건 호텔 측의 서비스였지만, 글쎄, 운명 같기도 하다.

솔이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 죽어서 사라질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싫지는 않지만. 약간 두렵기는 해. 남은 맥주를 따라줄래?”

남은 한 캔을 냉장고에서 꺼내서 얼음을 몇 조각 넣고 따랐다. 얼음과 맥주 사이에서 화학반응처럼 기포가 일어났다. 기포는 유리잔 위에서 맥주거품의 품 속으로 들어가서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리고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었던 말이다.

마르크스. 솔은 그렇게 말하고 처음으로 웃었다.

그거 알아? K는 Y대에서 정파가 없는 운동권으로 한때 유명했어.

그래. 아무 것도 놀랍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으므로 솔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K의 아버지는 KBS FM 라디오에서 음향 엔지니어로 일하셔. 그와 같이 Y대 출신. 어머니는 전업주부지만 과거에는 이혼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뛰어난 변호사였어. 연 수입이 10억이라나 뭐라나. 뜬소문이 많았지.

K의 형제는 두 명이야. K의 형은, 넌 외동으로 알았겠지만, 미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해. 확실한 정보는 아니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솔은 여기서 길게 말을 끌었다—K, 우리 사랑스러운 미소년 K는, 소년원에 들어간 적이 있어. 친구의 죄를 뒤집어쓰고 육 개월 동안 철창 신세. 어린 나이에 육 개월이라는 시간은 정말로 길었겠지. 나는 그가 감옥을 어떻게 견뎠을지 궁금해. What a pretty boy, pity boy.”

역겨운 정보들이다. 솔은 사용이 금지된 화학 무기로 전쟁을 선포하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K의 가족과 비교하면 평범했다.

부산의 어느 특급 호텔에서 K의 신상을 조사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왜 여장을 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아?”

“마치 탐정 소설 같네. 구린 탐정 소설.”

“사물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자동차 회사의 명문이야. 문학적이고, 감동적이고, 현실적이지. 우리는 이제 K를 만나러 갈 거야. 단, 오늘은 아니고 내일. 부산에 K가 왔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Do you wanna join us?”

그 날은 솔과 함께 킹사이즈의 넓은 침대에서 잤다. 기묘하고 끔찍하고 생생한 날이었다. 이번 여행을 오면서 그녀는 코스프레 의상을 챙겨왔다. 호무라였다. 시간여행의 능력을 가진 호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도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회색 톤의 의상과 프릴이 달린 치마, 검은색 스타킹과 보라색 소울젬은 그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우리는 함께 로비까지 내려가서 조식을 먹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솔은 자신의 방에 가서 아케미 호무라로 갈아 입고 나온다고 그랬다. 나는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표현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보나 이번 만남은 솔이 계획하고, 조명과 무대 연출을 담당하고 배역까지 도맡은 연극임에 분명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 코스프레 의상을 준비했고, K 가족의 정보를 합법인지 불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입수하고, 화룡점정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K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전 여자친구와 만날 것이라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너 혹시 부산에 있어?”

잠시 후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바람이 부는군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고, 파도가 치기 시작하면 갈매기들이 높이 날아요. 갈매기들은 본능적으로 파도를 읽을 수 있답니다.

저도 의상을 챙겨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코스프레를 한 솔과 로비에서 만나서 약속 장소인 영화의 전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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